만주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전투들을 치르면서 독립의 길을 다지고

8. 대한통의부를 창립하여 총장에 추대 

3.1운동이 뜻밖에 거세게 일어나고 이어서 상해에 임시정부까지 세우는 등 우리 동포들의 독립운동이 조직적이고, 활발하게 진행되자 일본은 당황하여 안달이 났다. 우리나라를 차지한 그 여세를 몰아 만주와 중국까지 단숨에 집어 삼키려는 계획을 세운 일본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여론이 점점 나빠지게 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이제 노골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만주를 휩쓸어 버려라.”

일본정부의 명령은 뒤에서 정부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군부의 뜻대로 이런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군에서는 이런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정규군 2개 사단을 급히 중국 땅 요동반도의 나남과 대련 항구에 보냈다. 그들의 목표는 만주 동삼성의 우리 독립군의 근거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쓸어버릴 심산이었다.

만주를 지배해온 장작림에게는 마적단이 우글거리고 사회질서가 문란한 것을 바로 잡아 주겠다는 말로 어르고 달랬다.

“우리가 당신의 골칫거리를 없애 주겠소. 우리 군대로 골치 아픈 마적단들을 토벌하여 줄 테니 함께 나와서 우리 작전을 도와주시오. 어떻소?”

“당신들이 마적단을 토벌하여 준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우리가 무얼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만주에 있는 우리 일본신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민을 보호 한다구요? 일본사람들이 지금도 불안합니까? 헌병과 경찰이 파견 되어 잘 보호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병력만 가지고는 독립군들을 막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적을 친다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핑계이고, 독립군을 치겠다는 생각이군요?”

이 말에 일본군의 대표는 더 이상 무어라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사실은 바로 그게 목적이오. 그러나 이건 꿩 먹고 알 먹고 가 아닙니까? 당신들은 그냥 싸움에 참가 하는 척만 해주면 우리가 마적들을 깨끗이 몰아내고 말테니까 당신들은 걱정거리를 없애는 거고, 우리는 독립군을 휩쓸어 버리면 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속임수에 장작림은 그만 일본군이 만주 벌판에서 작전을 하는 것을 방해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말았다.

일본은 이번 기회에 만주에 출병을 하면 아애 만주를 집어 삼킬 계획 이었다. 허수아비 같은 만주국을 집어 삼키기는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군사를 몰고 들어간 이상 그들이 만주에서 활동을 하고 군대를 이동하는 것은 마음대로 이고 마적들을 물리친다고 도시든 어디든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여서 만주국을 삼킨 다음에야 누가 뭐라 하겠느냐는 속셈이었다. 적당히 허수아비로 누구 하나 내세워서 어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 한 것이다. 그래서 압록강 하구 쪽에 1개 사단을 배치하고, 두만강 기슭에도 2개 사단을 그리고 대련 항에는 3개 사단을 투입하면서 러시아에 가 있던 19사단의 병력까지 만주로 이동을 하기로 하였다.

▲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쓴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책 표지

임을 모를 리 없는 독립군 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홍범도, 최진동 부대를 일본군의 진지를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 지역의 각 부대는 일본이 만주로 건너오기 위해서 진지를 친 압록강 건너의 진지들을 습격하여 후방에서 싸움을 벌이므로 해서 일본군의 작전을 흩으러놓기로 하였다. 이런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홍범도, 최진동 두 부대 모두 1200여명의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서 일본군의 진지를 공격하고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를 공격하여 파괴하여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자성, 강계, 만포진 등지를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일본군인들이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에 화가 난 일본군이 3개 지대를 간도로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교묘히 꾀어 들여 산과 산 사이 좁은 골짜기에 몰아넣고서 산비탈에서 내려다보고 총격을 하니 일본병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무조건 산위를 향하여 총을 쏘다가 쓰러져 갔다. 이것이 봉오동 싸움이었다.

6월에 일어난 이 싸움 때문에 이를 갈던 일본은 만주로 들어올 빌미를 만들기 위해 벼라 별 수단을 다 써 보았다. 그렇지만 일본은 만주가 중국의 땅이므로 함부로 군대를 몰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적두목 장강호를 움직여 혼춘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들은 10월 2일 새벽에 마적단을 시켜서 혼춘 시내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중국 주둔군은 일본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한쪽 성문을 맡은 일본군은 슬그머니 성문을 열어 주고 도망을 치는 척 하였다. 마적단은 성안에 들어와 마음껏 노략질을 하면서 일본영사관까지 습격을 하지만, 그들은 이미 다 피해 버리고 별 볼일 없는 일본인 몇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중국 당국과는 협의도 없이 󰡔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구실로 만주에 군대를 들여보냈다. 이에 중국에서는 우리 독립군들에게 일본인들의 눈에 띄지 않을 깊은 산속으로 피신을 하도록 알려 왔다. 독립군에서도 중국이 난처한 입장에 다다르면 우리를 도울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고 북로군정서가 있던 왕청현을 떠나 장백산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왕청현을 떠나 화룡현 삼도구로 행군하고 있을 때, 안무, 최진동 등 다른 독립군부대들도 뒤를 따라 도착하였다. 10월 18일 오후 지형을 살핀 후 적들의 움직임을 정탐해보니까 일본은 3면으로 독립군을 포위하여 섬멸시킬 계획임을 알아 챌 수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전투부대를 편성하였다. 훈련이 덜된 약 삼분의 이 정도의 비전투원들은 제 1대대로 편성하여 김좌진 장군이 이끌고 뒤쪽을 맡게 하였다. 연성소를 졸업한 보병 600여명을 중심으로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으로 제 2대를 편성하여 이범석이 지휘를 하였다.

이범석은 백운평의 유리한 지점을 잡아서 감쪽같이 위장을 하고 적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 일본군의 선봉대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열 걸음 앞에 오기까지 기다렸다가 30분만에 섬멸을 하였다. 한 시간쯤 후에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가 이 백운평에서 선발 부대가 전멸한 것을 분해하며 밀려 들어와 전투가 시작 되었다. 그러나 숫자적으로나 무기로나 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적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뒤따라오던 일본군부대는 앞선 부대가 독립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는 것을 보자 악이 받쳐서 기관총을 쏘아대며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싸움을 하였으니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이 때 이도구 방면으로 우회하던 일본군 1개 대대가 전투가 벌어진 것을 보고 독립군의 오른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좌우에서 적을 맞게 된 독립군은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맞서서 싸웠다. 점점 일본군의 포위가 좁아들자 김좌진 장군의 머리에는 한 꾀가 떠올랐다.

“적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만히 후퇴하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독립군은 계속 총을 쏘아 대면서 슬그머니 몸을 빼어 빠졌다. 그러자 양쪽에서 쳐들어오던 적들은 서로를 확인할 틈도 없이 자기들끼리 총격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의 복장이 일본군과 비슷하여 일일이 확인을 하지 않으면 서로를 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총 한방 쏘지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총을 쏘며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1. 봉미구에서 돌아오는 적이 약 1시간 후면 도착할 것이다. 퇴로가 막힐 수 있으니 아군은 이도구로 방면으로 후퇴한다.

2. 제2대는 그 자리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제1대를 엄호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후퇴하라.

3. 제2대는 밤 2시 이전에 160리 떨어진 갑산촌에 도착하라.

오전 10시경에 명령을 받은 후 추위와 굶주림, 피로, 가시밭길 등으로 고난을 헤치기를 14시간 강행군으로 밤 2시 40분경에 갑산촌에 도착을 하였다.

그런데 부락에 도착하자마자 천수평에 적군의 기병 120여명이 해질 무렵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약 1시간을 잠을 잔뒤 병사들을 이끌고 새벽 4시경에 제2지대를 선두로 하여 한 시간 후에 천수평에 도착을 하였다.

적의 기병들은 「시마다」란 자가 이끄는 부대로 독립군이 160리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토성 안에 말을 매고서 인가에 들어가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범석은 단잠에 빠져 있는 이들을 기습을 해서 120명 중에서 단 4명만이 목숨을 유지하여 달아났을 뿐 나머지 전원을 사살하였다. 그렇지만 적군의 사령부가 불과 10km 밖에 있는 어랑촌에 있었으므로 곧 공격을 해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적 전방의 고지를 점령하여 이쪽에서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어랑촌의 서남단 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21일 아침 9시 드디어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 되었다. 일본군은 야포와 기관총으로 독립군을 공격 해왔으나, 이미 고지에 몸을 숨긴 독립군에게는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독립군 쪽에서는 고지에서 기어오르는 일본군을 보고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이때 일본군의 병력은 우리 독립군의 4배를 넘는 숫자 이었다.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싸움으로 일본군을 깨끗이 쓸어버린 독립군은 즉시 만기구의 밀림 속으로 숨어들어서 하룻밤을 지샌 뒤 22일 다시 행군을 계속하였다.

오후 3시경 독립군이 맹개골이라는 산림 속을 통과할 때 일본 기병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독립군은 간단히 이들을 섬멸하고 다시 행군을 계속하다가 20리쯤 가다가 앞쪽에서 어른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서로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구분하지 못한 채 총사령관이 소리쳤다.

“아군인가 ?”

“...........”

이 소리에 놀란 맞은편의 부대가 즉시 후다닥 놀라서 작전 자세를 갖추자 일본군이란 것을 알고 즉시 공격을 하여 격퇴시켰다.

23일 다시 부대는 쉬구에서 일본군과 만나서 격퇴를 시켰다. 그 동안(21일 부터 23일 까지)연 3일간의 고된 싸움과 하루 사이에 백여리를 걷는 고된 격전 속에서 독립군들이 먹은 것이라고는 감자 몇 개씩뿐이었다. 너무나도 배가 고픈 독립군들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소나무 이파리를 씹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배낭 속에 있는 양초를 나누어 먹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용감히 싸운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1,254명을 사살하고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는 60여명의 전사자를 내었을 뿐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이들을 이끌고 소련과 만주의 국경에 있는 밀산에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집결 하였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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