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동포 단합을 위한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총장으로 추대되다.

이렇게 일본은 192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독립군에게 연달아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6월에는 최진동 부대에게 봉오동 전투에서 대부대를 잃고 달아나야 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본은 만주에 있는 정예부대를 총동원하여 만주의 독립군을 휩쓸어 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0월에는 우리 독립군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고 가장 빛나는 승리를 한 청산리 싸움에서 2개 연대가 전멸 당하는 패전으로 일본군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코가 납작하여진 일본군은 눈이 벌개져서 어떻게든 청산리 전투의 무참한 패배를 복수하려고 덤볐다.

그리하여 만주벌판에서 10월 일본의 조선군과 포조군, 관동군이 공동으로 출병한 󰡔경신참변󰡕이라 부르는 만주교포대학살 사건(이 사건은 만주지역의 우리 교포들을 독립군과 같이 취급하여 무참히 살해했음)으로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러시아의 자유시를 찾아서 험한 산을 넘고, 눈길을 헤매다가 쓰러져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은 무조건 우리 동포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 하고서는 독립군을 죽였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체면을 살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조선 독립군 45명을 붙잡아 처치하였다.”

이런 보고는 날마다 일본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더 많은 숫자를 죽였다고 선전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민간인을 죽이는 사건이라도 오히려 일본의 상부에서는 뻔히 알면서도 체면을 위해 반가워만 하였다.

이렇게 많은 동포들이 죽고 흩어져서 큰 타격을 받은 만주에 얼마 남지 않은 각 독립운동단체들은 통일된 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숫자도 적어지고 이제 일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보다 효과적인 항일 운동을 위해서는 대동단합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1921년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각지에서 교통과 통신이 끊기는 등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각기의 군단을 따라 다시 모이면서 조직을 정비하여 일제와의 항전을 다시 시작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직이 서간도 지방에서 활약하던 '서로군정서'가 액목현에 다시 모여서 '군정부' 설립에 착수 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국장(국방부장관) 황학수를 맞이했고, 1910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한인사회를 이끌며 강력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해오던 박용만을 맞아 총사령관으로 뽑아 독립군을 다시 정비 하였다. 군정서의 편제도 위원제로 하기로 하여, 민정을 담당하는 집행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에 이진산, 학무위원장에 이상훈, 법무위원장에 김동삼이 뽑히고, 독립군 참모장에 황학수가 임명되었다. 그는 남만주 일대의 일본 침략기관의 파괴와 일본인은 물론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없애는데 나섰다. 이 무렵 우리 동포들 중에는 일본의 간사한 꾀에 넘어가 동족을 팔아먹는 헌병의 보조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총사령관에 뽑혔던 박용만 마저 국내에 들어가서 일제의 󰡔제등󰡕총독에게 매수되어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여론이 높아져서, 군법회의를 열어서 본인이 없는 궐석 재판을 열어 사형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후임 사령관으로 오랫동안 군정서 사령관이었던 김창환을 다시 임명하여 활기를 되찾았다. 김창환 사령관은 취임하자 독립군을 훈련시켜 전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각지에 흩어져서 활동하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하는데 힘을 썼다.

이리하여 1922년 8월이 되자 남만주에 있는 크고 작은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하여 환인현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소집하였다. 1922년 8월 23일 남만주통일회의 대표로 참석한 대표들은 다음과 같았다.

참석 민족대표단의 명칭

참석한 대표자 명단

남만한족

통일회의 회장

김승만

군정서

대표

백광운,김시풍,김장하,박태호,이범천,성오관,김해운,

한응열,유상화.

대한 독립군 대표

이웅해,이영식,최석순,전창희,정경순,정강진,김동식,

정득영,김성산,이봉주,문창현,맹철호,김용칠,이웅태,

사병희,손병헌,신세용,김유성,박수양,신중집,최해진,

조칠능,강병회.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표

이형갑,이영해,한일선,한용숙,곽상진.

대한

광복군영 대표

변창근,이영선.

대한

정의군영 대표

박정석.

대한광복군총영

백남준,김창의,장영해,이달성,정도산,

평안북도

독판부 대표

신언리,김진준,김태현,이관목,임시형,선우맹,이덕숭

안학세,최민신,권형걸,문동승.

 

“우리가 일본의 공격을 받아서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가지고는 도저히 저들에게 대항을 하여 싸울 수가 없다. 이렇게 힘이 약해 졌을수록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이렇게 외치는 이들의 주장은 모든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가슴을 파고드는 바가 있었다. 저들의 만행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온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주 일대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으나, 각기 따로따로 활동을 하고 있던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국민단, 광복군총영, 벽창 의용대, 평북독판부, 보합단, 광한단등 무장항일 조직의 대표들이 뜻을 한데 모아 '대한통의부'를 조직하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대한통의부의 창립 당시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총장 : 김동삼

부총장 :채상덕 참모부 :부장-이천민 부감-김덕원

군사부 :부장-양규열 부감-김 혁 의용군사:사령장-김창환

법무부 :부장-현정경 부감-박태수 사판소:소장-이영식 사판원-김구명

검무국:국장-최명수 검무감-김관성

학무부 :부장-신언갑 부원-南廷都,이세준,곽상하.

재무부 :부장-이병기 부감-정석태.

교통부 :부장-오동진 부감-신태익 ----교통국:국장-황동호

실업부 :부장-변창근 부감-유응하 식산국:국장-박득산

권업국:국장-강제동

도서국:국장-강병회

교섭부 :부장-김영만 부감-김신택 선전국:국장󰠏김창의

민사부 :부장-이웅해 부감-강제의 지방총감소:총감󰠏 참사 - 서기 - 검무감

이 표를 자세히 보면 지금 우리나라 정부의 조직과도 거의 같은 것으로 얼마나 알찬 조직으로 우리 동포들을 보살필 계획을 세웠는가를 알 수 있다.

그 무렵의 만주 일대의 항일 무장단체들은 일본군의 만주출병으로 인해서 수많은 피해를 입어서 그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일본의 군과 경찰에 맞서 싸우는데 조직적으로 잘 싸울 수가 없었다. 싸움에서 큰 성과를 올리지도 못한 채 여기저기서 게릴라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남북만주의 각 군단의 독립군들은 그들의 본거지를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기관들의 파괴와 일본 경찰이나 군인과의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밀정 노릇을 하는 사람을 없애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때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에 깊숙이 들어가 일본군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의 주재소 등을 습격하였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으로 민족의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산된 군사 조직으로는 조직과 장비가 우수한 일본군이나, 경찰과 맞서 싸우기에는 힘이 겨웠다. 더구나 일본과의 싸움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게 아니고 보면 항구적인 항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통일된 무장 투쟁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구 되었다.

그리하여 남만주의 각 군단이 먼저 단일단체로 통합이 된 이 통의부를 만든 목적은 독립군을 거느리고 항일전쟁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십만이 넘는 우리 동포 사회의 자치를 담당하기 위한 행정부의 기능도 갖추려고 하였던 것이다. 중앙기구를 정비하고 지방자치 행정과 군사양성기구를 설치하였다. 총장에 채상덕, 비서장에 고할신, 민사부장에 이용해, 군사부장에 이천민, 교육부장에 김동삼, 실업부장에 변창근, 경무감에 진덕원, 사령장에 김창환 등을 임명하였다. 이렇게 기구를 갖추므로 해서 만주 지역을 총괄하는 우리 동포들의 정부와 마찬가지의 일을 하게 되었다.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 원본 파일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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