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푸젠성(복건성)에서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약 110Km 해상에 있는 나라 대만(臺灣). 1885년 하나의 성(省)으로 독립하였고 청일 전쟁 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장개석) 정권이 건너와 성립된 국가로 당시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명칭을 공식 국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대만의 문화가 상당 부분 중국 본토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이난(Tainan)은 대만의 고도(古都)로서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다는 얕은 정보만을 가진 채, 나는 가오슝 공항에서 그곳 타이난으로 향했다. 그곳에서의 5일간의 시간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여행의 방식은 물론 여행지에 대한 인상도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색다른 경험이었다.

 

ㅣ 타이난에서의 첫 느낌

가오슝 공항에서 만난 입국 수속 직원들의 편안한 인상은 다른 곳에서도 내내 이어졌다. 우리나라 70~80년대 거리같은 느낌, 그 모습 그대로 살려둔 채 지금을 사는 사람들, 그들이 2017년의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 오랜 우정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편하게 다가왔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은 사람들의 인심만이 아니었다. 음식도 그렇고 주변의 모든 환경도 그랬다. 인공적인 것을 싫어하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지나친 바램도 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타이난 여행은 일반적인 관광이 지루해진 내게 잠수의 시간과도 같은 완전한 휴식의 여행으로 기억될 것 같다.

여행에서의 휴식을 그린다면 여전히 휴양지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산수경관이 좋은 환경에 자신을 내려놓는 그런 그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리고 온 것은 이런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시간 단위로 일정을 안배하고, 그 일정 안에는 반드시 무언가 생산적인 행동과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여기서의 생활은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나라가 규모의 경제를 중요시하며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제로 성장했던 것과 달리, 대만은 중소기업(또는 중견기업) 중심의 탄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다. 세계경제가 거대기업, 다국적 기업 중심으로 무언가 큰 힘을 축으로 그 기업의 그늘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그늘의 혜택으로 살아가는 듯한 모습과 다른 그들만의 방식을 택했던 대만은 한 때 우리가 부러워하기도 했던 그런 나라였다. 강한 힘만이 세상의 무대를 지배하게 되는 시류 속에서 대만 경제가 경쟁력을 잃어가기도 했지만, 도래하고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에는 오히려 걸맞은 기업환경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타이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거리의 모습, 건물들, 뭐 하나를 보아도 나만 튀어야 한다는 강박도, 드러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경쟁, 성공, 이기는 전략, 강함,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스트레스, 이런 사회에 젖어 오랜 세월 살아왔던 스스로를 자꾸 돌아보게 한다. 처음에는 그들의 삶이 다소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왜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왜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가, 왜 좀 더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는가, 그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심리가 아닌가. 즐비한 가게들은 왜 좀 더 근사하게 개조하고 좋은 것으로 치장하고 채우려 하지 않는가. 이상했었다. 어쨌든 돈을 벌기 위한 것인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감에 있어 자신의 존재에 충실했던 것이고, 그저 많은 사람들 속에 자신이 함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을 뿐인 자연스런 삶이었던 것이었다. 거기엔 어떤 과장도, 허풍도, 미련도 필요 없었고, 자연이 흘러가는 방향대로 그저 맡기면 되는 것이었다.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지인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대만에서 사업을 했고 나름 결과도 좋았던 터라, 그 기반을 가지고 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돈이 주는 경제적 안락함에 어느 정도 반응하고 기대어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그 지인의 삶도 다른 대만(아니 타이난이 맞겠다)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소 단조로울 것 같은 일상의 반복, 소박한 생활 패턴, 작은 것들과 수렴하면서 과하지 않음에 만족하는 생활들, ‘한국에 가면 이보다 화려하고 럭셔리한(?) 안락함이 있을 텐데 왜 굳이 여기서?’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택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사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그 사람들에 있었던 것 같았다. 편하고, 쉽게 변하지 않고, 경쟁할 필요가 없고,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 어찌 보면 잔잔히 흘러가는 물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근래에 새로이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 사는 모습이었으며, 너무도 당연시하면서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게 하는 모습들이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항상 웃어라’, ‘재밌는 삶, 활기찬 삶을 찾아라’, 이 모든 구호가 왜 우리에게 굳이 그렇게 필요했던 것일까 생각하게 한다. 알고 보니 이런 구호들은 일종의 강박증에서 온 것이었다.

강한 기쁨과 슬픔의 감정들, 그리고 얼마 전 우리를 전율케 했던 촛불의 기쁨과 하나 된 함성들까지, 이 모든 것들은 왜곡된 세상사를 바로 보려다 보니,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다 보니 필요했던 마약 같은 암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평온하게 흘러가는 사회에서 이런 감정의 기복이 왜 필요할까. 그럼에도 여전히 낯설기만 한 이 잔잔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듯한 이들의 일상과 표정이 내게는 오히려 진한 애수감과 함께 다가왔다. 그리고 이 기분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내내 생각했었다.

 

ㅣ 첫째 날 / 구 시가지를 기웃거리다

첫날 오후에는 호텔에 짐을 풀고 양쪽 길옆으로 늘어선 2~3층 정도 상점들이 즐비한 구시가지 도로를 걸으며 기웃거렸다. 그 거리의 한 허름한 음식점에서 먹은 볶음밥과 볶음면, 조개탕의 맛은 소박하면서 익숙한 맛이었다. 물론 우리를 안내해주었던 그 지인의 ‘혹시 모를 강한 향료를 넣고 뺐던 배려’가 가미된 맛이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고 단장하기 이전의 소박한 인사동 거리와도 같은 풍경이랄까? 다르다면 상가에서 사고파는 내용들이 달랐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함께 오가는 것이 달랐을 뿐인 그런 거리를 서성이며 첫날을 보냈다.

 

째 날 / 쫓기지 않는 즐기는 골프를 치다

운동으로 골프를 시작했지만 최근엔 거의 Field에 나간 적이 없었다. 분 단위 티업으로 앞 팀을 밀어내고, 그 속도를 맞추도록 강요하는 한국과 달리 타이난에서의 둘째 날 일정이었던 골프 라운드 역시 그저 자신의 속도에 맞추면서 즐기는 제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우리처럼 극성스런 골프가 아니기도 하지만, 간혹 각 팀들의 진행속도가 달라져 팀 간 서로 마주치게 될 때조차 당황할 필요 없이 양해 하에 순서를 바꾸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만든 시스템으로 스스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순리에 내맡기는 모습의 편안함. 우린들 그것을 몰라서 이들과 다른 방식을 살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었다. 이런 스트레스의 원인은 항상 이윤을 탐하는 기업의 속성이 개입되고 속도, 내용이 어느덧 주인이 되어버리는 주객이 전도되는데서 오지만, 여기 대만에서는 그러한 본질적 중심을 잃지 않고 가고 있는 듯했다.

골프 이후 천연 머드 온천(일본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최초로 만들었다고 함)에서 보낸 시간 역시 좋기는 했지만, 비좁고 불편한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의아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의문과 무관하게도 그들에겐 딱히 개선할 의지도 필요도 없는 듯 보였다. 온천 후 마실 물을 찾으려 해도 컵이나 물병이 없인 먹을 수 없는 정수기가 있을 뿐 음료수 하나 팔지 않았다. 하다못해 자판기라도 놓으면 돈이 될 텐데 왜 그러지 않는지 의아해했던 그 의문의 시선은 곧 자신의 고질적인 자본주의적 마인드에 스스로 놀라면서 거두어 버렸다.

 

ㅣ 셋째 날 / 고도(古都) 타이난을 느끼다

셋째 날은 호텔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은 후 호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커다란 가구 전시장과 주유소를 제외하고는 작은 가게들이 도로변을 따라 있었고 그 가게들 앞에는 여지없이 자동차와 함께 오토바이들이 서 있었다. 대만 사람들이 자전거처럼 이용하고 있는 오토바이 때문인지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인도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동차와 오토바이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주변에 카페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멀리 m자(맥도널드)가 작게 보이긴 했으나 가깝지 않은 거리인 듯하여 바로 길 건너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가 요거트 하나를 맛있게 먹고는 호텔 로비로 돌아왔다.

우리(+친구1)는 지인과 함께 자동차로 안핑꾸빠오(安平古堡, 안평고보)를 향해서 갔다. 대만 남부가 1624년 네덜란드 식민지가 되면서 동인도 회사의 대만 수탈도 본격화하면서 처음으로 요새인 타이난의 안핑꾸빠오가 1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한겨레 온, 대만이야기 5). 청나라 때의 정청꽁(鄭成功, 정성공)이 1661년 350척의 군함에 2만 오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1662년 네덜란드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안핑꾸빠오를 항복시키고 대만에 왕국을 세우게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사진도 찍었다.

우리나라 유원지 주변과 비슷하게 형성된 안핑꾸빠오 주변의 먹을거리, 소소한 기념품 판매, 각종 행사와 공연 등을 보면서 많은 대만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건 값을 물어보면서, 두화(豆花, 떠우화, 순두부에 각종 달달한 토핑이 얹어져 나오는 음식)를 먹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물론 지인의 통역으로) 그들과 표정 대화도 나누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타이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딤섬 집에서 다양한 딤섬도 배부르게 먹은 후 마침 운 좋게 열린 동네 야시장(1주일에 2회 열림)에서 이것저것 시식도 하면서 그들의 사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넷째 날 / 도심의 근사한 거리에서 커피 한잔

넷째 날인 일요일은 아침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인천공항까지 입고 온 겨울 파카가 무척 생각나는 날씨였지만 가져온 얇은 옷들을 여러 겹 걸쳐 간신히 추위를 면한 채, 동네 1Km 반경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어제 보았던 맥도널드의 m자를 향해 횡단보도를 가로로 세로로 여러 차례 건너면서(교통 신호체계가 우리와 조금 달라 정신이 없었지만 곧 익숙해짐) 앞으로 걸어갔다.

맥도널드에 도착해 Cafe 코너에서 주문한 따뜻한 카페라떼 한 잔을 음미하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길 건너편에 커다란 2층 건물인 가구 매장이 보이고 그 옆으로 많이 본 듯한 독수리 문양이 눈에 띄기에 시선을 돌렸더니 한자로 (~ 파출소)라 쓰여 있었다. 다시 옆으로 10m 정도 시선을 옮기자 우체국이 보인다. 커피가 반잔으로 줄어든 사이 빗방울이 떨어지는지 매장 앞에 늘어선 오토바이 사이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비옷으로 무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동네 한 바퀴 돌아본다는 기분으로 우산도 없이 나왔던 터라 택시를 부를까 어쩔까 생각하는 사이 빗방울도 잦아드는 것 같아 그냥 후드 티에 붙은 모자를 깊숙이 쓰고는(스카프를 머리에 두건처럼 둘러 묶은 친구의 모습이 흡사 동화 속 꽃 장사 아줌마 같다며 시시덕거림) 부지런히 호텔로 향해 걸어갔다. 역시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 뒹굴뒹굴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의 구세주인 지인의 자동차를 타고 타이난에서 유명하다는 CHIMEI CAFE로 향했다. 카페는 도로 모퉁이 분위기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토스트 한 조각과 함께한 차가 맛이 좋았다. 인근 도로와 건물 등 분위기도 지금까지 본 것과는 다르게 제법 말끔하고 넓게 뚫려 있었으며 건물도 제법 높은 것들이었다.

오는 길에는 지인의 집 근처 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는데, 이 역시도 우리나라 공원처럼 완벽할 정도로 다듬어진 모습이 아니라, 기본 골격만 공원의 형태를 만들었을 뿐 대체로 자연스런 모습 그대로, 그래서 인공적인 완벽함에 익숙해버린 시선으로 보면 다소 황량해 보이거나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든 완벽하게 세팅해 놓은 듯한 모습이 아니라, 어느 일부분은 우리의 시선을 위함이 아닌 그저 그 대상(객체)의 몫으로 남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걸 장악하길 원하는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방치된 상태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날 밤 마침 운 좋게 열렸던 온갖 먹을거리로 가득한 야시장에서의 먹거리라든가, 대로변 탁자에서 먹은 만두·볶음면·계란지짐(통새우와 야채가 들어감) 등은 타이난에서의 먹거리 중 최고였던 것 같다. 타이난을 떠나기 전날 밤 먹었던 화궈(우리의 샤부샤부와 비슷함)는 맛있는 집이라고 해서 대기 줄까지 설 정도였지만 내게는 그저 그랬던 것 같다.

 

5일간 한량 생활이 준 에너지를 고스란히..

그렇게 대만 타이난에서 4박 5일을 한량처럼 보낸 기억들이 내게 준 메시지는 일관성 있는 그것이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들, 거리, 관계, 음식 맛, 환경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되어야 하고 개선할 구석을 남기지 않는 우리의 방식과 많이 달랐으며, 과한 액션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도 않으며 그저 자신이 이 사람들 이 환경들에서 두드러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여유로움 자체를 보는 듯했다. 아니 여유로움이라는 말 자체도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바라보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니, 그들은 그저 자연스런 삶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굽이 져 흐르는 평평한 땅’이라는 의미(맞는 것인지는 모른다)의 대만<대(臺, 높고 평평한 땅), 만(灣, 물굽이)>의 느낌을 대만의 한 도시에 불과한 타이난에서 느꼈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이었을까. 혹여 다음 대만 여행에서 이 느낌이 여지없이 깨지게 될지라도 그 느낌이 갱신되기까지는 이번 타이난에서의 느낌을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려 한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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