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으로 시집가는 딸에게!

대만에 관해 언급하는 저의 백 마디보다 더 가치가 있을 한 사람을 소개하고, 그녀의 글을 올립니다.

30년 전 한국 유학생을 사랑하여 한국으로 시집온 대만 새댁 나문황(羅文凰, 루어 원 황)이야기입니다.

1986년경으로 기억합니다. 한국 유학생들끼리 모여 농구 시합을 할 때 한 동문이 예쁜 여자와 함께 와서 자기 친구를 소개하였습니다. 그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친구의 행운에 부러울 따름이었지요. 학교 맞은편에 있는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고, 저와도 알고 지낸 지 30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현재 살고 있는 타이난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쟈이(嘉義,가의)라는 도시 출신입니다. 종종 친정에 오면 연락을 주고, 여느 대만사람과 마찬가지로 제게 항상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일 년 전에는 큰 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3월 24일 한국시간 새벽 3시 7분에 보낸 문자를 아침에 읽었습니다.

『23일 아침 눈뜨기 직전, 꿈속에서 큰오빠가~ ‘원황!’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큰 오빠는 보이지 않고 마치 바로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오후에 언니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편안히 가셨다고. 아마도 이른 아침 큰 오빠가 나를 찾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에게 갈 거라고 찾아왔나봅니다. 중략

이번에 가면 엄마의 따뜻한 손을 만져볼 수 없겠네. 엄마와의 정은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는 건가.

엄마 잘 있어!

혹시 이것도 꿈이 아냐? 아침에 큰오빠가 나를 불렀던 것처럼.』

저는 윗글을 읽고 아무런 답장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어떤 말로도 이국에서 엄마를 보낸 딸을 위로할 수가 없었지요.

약 1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큰 오빠는 그동안 꿈속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답니다.

자정을 넘긴 한국시간 12시 13분에 또 글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밤늦도록 울면서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쓴 글 일겁니다.

『1989년 멀리 한국으로 시집갈 때, 어머니는 제게 말했습니다.

"너의 시댁 친척이나 친구들은 모두가 처음으로 〈대만인〉을 대할 것이다. 너의 어깨에는 〈대만인〉이라는 세 글자를 짊어지고 있다. 그들 모두는 너의 행동거지를 보고 〈대만인〉이 ‘좋다 나쁘다’를 평할 것이다."

어머니는 제게 말을 삼가고 행동을 신중히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등 뒤에서 대만사람이 나쁘다는 소리를 듣게 하지 말라고 했지요. 예를 들어 윗동서가 6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거든 반드시 5시 30분에 일어나라. 어떤 일에나 ‘저는 대만사람이라 못해요’라고 절대로 말하지 말고, 눈치껏 손 빠르게 움직여라.

어머니는 제게 또 말했습니다. 열심히 해라. 죽지 않는다. 엄마는 열심히 하다 죽는 사람 못 봤다. 결혼생활은 단지 남편과 시부모만 있는 게 아니란다. 이웃이나 친척에게 멀고 가까운 걸 따지지 말고 반드시 정성껏 대해라. 오로지 네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면, 다른 사람들도 네게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이것이 외국남자를 선택한 제게 어머니가 주신 가르침이었습니다.

28년이란 세월 속에 숱한 비바람이 지나갔습니다. 만약 누가 국제결혼을 어떻게 견뎌왔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아무래도 어머님의 가르침으로 지탱하였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엄마~! 이제 다시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그렇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영원히 기억할게. 엄마가 해줬던 말 하나 하나 꼭 명심할거야.

만약 엄마가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친정에 가서 몇 년간 엄마 간병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난 엄마와 나와의 이런 〈정〉을 깨닫지 못했을 거야. 내 마음 속에 간직한 엄마와 함께했던 나날들, 이런 추억들이 가장 가치가 있겠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대.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한 엄마는 영원히 살아있어.』

 

 

▲ 〈엄마와 나〉     2012년 나문황작.
세월이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엄마의 치마꼬리를 부여잡고 또 다시 따라가렵니다.-나문황

 

나문황씨는 1987년 한국인 유학생 남편과 대만에서 간략한 혼인식을 올렸습니다.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만 풍습에 따라 100일 이내에 혼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정식 결혼식은 1989년 8월 한국에서 했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두 참석을 했지요.

대만인들은 결혼을 일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라고 하여 終身大事라고 합니다.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 그들의 풍속에 따라. 결혼식은 가장 좋은 음식을 가족 친지들에게 대접하는 행사이지요. 요사이 웬만한 서민들도 10명이 앉는 테이블에 60만원에서 80만원의 상을 차립니다. 제가 참석한 결혼식을 보면 그런 테이블이 10개에서 30개 정도가 되니 식비가 상당히 나가지요.

최근에는 서양식이 많이 가미되어 양장과 하얀 드레스, 전통 의상 등을 서너 차례 바꿔 입고 나와 인사도 하고 촬영도 합니다.

한국의 80년대 결혼식은 대부분 식장에서 주례말씀이 있고, 사진촬영과 폐백, 그리고 자리를 옮겨 장터같이 어수선한 식당에서 잔치국수나 갈비탕 한 그릇에 떡 몇 조각 먹고 바쁘게 헤어집니다. 멀리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이런 난감한 결혼식을 경험한 신부 가족들의 마음은 편치 못했겠지요.

대만사람들의 식탁에서는 고기와 탕은 빠지지 않는 식단입니다. 나문황씨도 고기를 좋아하고, 특히 생선을 몹시 좋아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끼 김치만 먹는 시댁의 식문화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답니다.

어렸을 적 길들여진 입맛은 평생을 가지요. 저 역시 가장 고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입맛인 거 같아요.

너무 적응하기가 힘들어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답니다. 며칠만 친정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엄마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답니다. 너 대만에 오면 문 안 열어준다고! 며칠 잘 먹고 한국에 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매번 음식 때문에 대만에 온다면 한국에 더 돌아가기 싫어지고, 결국 적응도 못한다고. 차라리 굶어라! 배가 고파지면 어떤 음식이나 맛있게 먹게 될 거라고 냉정하게 거절하던 그런 어머니였답니다.

대만의 장례식은 각자 가족들이 정한다고 합니다. 좋은 날로 택일을 하는데 요사이는 가족들이 다 참석할 수 있는 날로 장례식을 정하는 추세랍니다. 지난 10년 동안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생명연장을 해오다 3월 2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가족들이 4월 1일 화장, 4월 2일 고별식(告別式,장례식)으로 정했습니다.

▲ 4월 1일 화장, 4월 2일 고별식(장례식)이 열린다고 하여 3월 30일 미리 방문을 하였습니다. 식장 준비에 바쁜 가족들! 생전에 꽃을 좋아 하셨던 고인의 자손들이 마지막 길을 꽃향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한국인 사위가 기억하는 장모님은 지혜로우시고 또한 엄격하신 분이었답니다. 8남매가 우애가 좋은 것도 장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병상에 눕자 1층에서 4층까지 사용하는 대만식 건물을 지어 형편이 되는 남매들이 함께 거주하며 어머니 간병을 하고 살았답니다.

▲ 상단 좌측 매화문양 4층 건물이 나문황씨 가족들이 병상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새로 집을 지어 함께 살았습니다. 10년을 넘게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서로 도와 간병하며 살았지요. 하단 좌측 나문황씨. 우측 좌에서 두 번째는 남편 이은모씨.
▲ 천리교식 장례를 치렀습니다. 제관들이 집전을 하고, 직계 자녀와 며느리가 마지막 절을 올린 후, 꽃을 올립니다.
▲ 고별식에 참석한 분들께 가족들이 인사를 합니다. 장례식에는 지역 의원들이 참석을 하는데 모두가 자기 이름을 새긴 옷을 입고 헌화를 합니다. 선도차와 납골당으로 향하는 운구 행열. 대만의 일반 장례식은 대부분 불교식으로 한다고 합니다. 1987년 참석했던 불교식 장례식은 더 길었고 가족들 뒤를 따라 입관 전의 고인을 참견하였습니다.

나문황씨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며 한국의 문화와 기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외려 대만생활을 불편해합니다. 또한 한국의 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지회화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대만에서도 타이뻬이(臺北,대북) 타이종(臺中,대중)등에서 작품전을 열어 한국의 미와 문화를 알렸습니다. 특히 2015년 1월 7일부터 2월 8일까지 대만의 중부도시 루깡(鹿港,록항)문화원에서 개최한 ‘나문황 한지민속화개인전’은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고,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작품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여 누구나 공감하고, 유년의 추억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언어와 의복은 달라도 다함께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직접 참관을 한 저도 더불어 행복했지요.

▲ 루깡문화원 입구에 나문황 한지민속화개인전 알림판. 우측 하단은 대만종이예술협회 이사장. 작품을 소장하려고 구매한 후 작가와 함께.
▲ 우측 사진은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의사 부부가 작품을 구매한 후 작가와 함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중 13점을 판매하여 대금 전액을 대만창세기금회에 기부하여 의식 없이 생명연장중인 환자들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현재 성북동 자택에서 대만사람들에게 민박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먹거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으로 복귀한 나문황!

한국에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도 지속되길 빕니다.

 

많은 나문황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두 점을 골라 첨부합니다. 문화와 풍속은 달라도 어머니는 영원한 우리들 그리움의 고향입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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