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 있는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가 재통합이루어 내

그러자 김동삼이 나서서 중간에서 잘 조정을 하여 그 다음해에 국민대표자회와 새로운 중앙의회를 소집하여 원만하게 수습이 되어 정의부는 남만주의 지방의 한족 행정부로써 그 기반을 점차 굳혀 나갔다. 그리하여 1926년 11월경에 이르러 정의부는 길림성과 봉천성의 양쪽 성 관내에서 15,362호의 우리나라 교포를 통치하는 한편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 그 임무를 수행해 나가게 되었다.

한편 1926년 6월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과 중국 봉천성경찰청장 사이에 체결된 '삼시협정'이라 불리는 조약으로 인해서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전쟁을 계속해 나가는데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 협정은 간사하고 교활한 일본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활동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취재법이었므로, 이 때부터는 독립운동의 어려움은 더욱 심각해 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포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검문을 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포들을 잡겠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동삼은 남만주를 근거로 한 항일운동이 어려움이 더해 갈수록 흩어진 힘을 모아 적과 대항하려는 굳은 신념이 더욱 굳어갈 뿐이었다.

“일본이 우리의 목을 죄기 위해서 삼시협정으로 자기 나라도 아닌 이곳에서도 일본 경찰이나 헌병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니, 우리 동지들은 이제 더욱 조심스럽게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파벌싸움과 서로 헐뜯고 한데 뭉치지 못함을 슬퍼하면서도 동지들과 함께 단합할 꿈을 버리지 않고, 독립군에게 계속해서 할 일을 명령하여 속속 국내로 들어가 일제와의 항쟁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남만주의 각 단체와 군단들은 정의부의 결성이 되므로 해서 일단은 통합하자는 운동에 성공은 했으나, 자체 조직 안에서 파벌이 생기기 시작했고,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의 단체들이 모이고 흩어짐이 하두 자주 있어서 각 단체 지도자들의 사이에는 알력과 대립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 무렵에 만주를 근거로 하는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는 남만주의 정의부와 참의부, 그리고 북만주의 신민부로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1927년 봄 마침 안창호가 상해에서 길림으로 들어와서 조양문 밖 대동공창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나석주의사의 추도식을 갖고, 민족운동의 장래에 대한 강연을 겸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 동지들은 안창호선생의 강연도 듣고 나석주의사의 그 빛나는 애국 정신을 본받아서 더 옹골찬 독립운동을 하자는 결의를 다지기로 합시다. 여러분들은 모두 한데 모여서 우리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집시다.”

▲ 일송 김동삼<구글이미지 캡쳐>

정의부 간부를 비롯한 만주의 각 운동단체의 지도자, 지방유지등은 서로 연락을 하여 500여명을 초청하여 민족운동자들의 단결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경찰의 첩보원에게 비밀이 새어나가, 안창호를 비롯한 300여명이나 되는 유지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서 갇히고 마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길림대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수십 여일 동안이나 중국관헌들에게 갖은 고초를 다 겪고 나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돕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을 모두 잡아 가둔다면, 일본과 싸우고 있는 우리는 일본의 편인가 아니면 조선을 돕는 편인가?”

하는, 빗발치는 중국 안에서의 여론과 산서성 독군 민석산의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위협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단지 잃어버린 자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싸움이 우리에게 이로움이 있을망정 해로움이 없는데, 우리가 그들을 잡아 가두고 고생을 시키거나 일본에 넘기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니 어서 풀어주도록 하라.”

는 호의가 있어서 겨우 석방은 되었는데, 이 일을 기회로 군사운동의 통합운동을 더욱 서둘러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1927년 8월 하순에 길림에서 각 부대 대표자들이 모여 통일된 독립운동의 이념 아래 뭉쳐서 계속하여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런데 정의부 안에서는 촉성회파와 협의회파가 대립되어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신민부에도 공산당의 지휘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공작으로 알력이 겉으로 들어 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1927년 4월 1일 오동진 등 35명의 동지들은 모여서 '농민호조사'를 만들어서 농민 운동을 시작했었다. 이는 만주 지방에 이주해온 한국 농민의 생활안정과 산업, 교육, 위생보건의 향상을 위해서는 우리 동포들의 단계적 협동이 가장 크게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열두 항의 '농민호조사약속'을 정하고, 우리 교포들을 계몽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품앗이 같은 좋은 제도를 스스로 만들어서 바쁜 농촌의 일손을 한데 모아 일을 능률적으로 해나갔다. 이 천만리 먼 땅에 모인 우리들이 서로 돕지 않고 서로 헐뜯기나 한다면 중국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고소해 하면서 우리를 이용 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서로 돕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뭉칩시다.”

이런 그들의 외침은 우리 동포들을 조금씩 깨우치게 해주었다. 마침 만주에 와서 길림대검거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이 된 안창호는 이 농민호조사 운동을 매우 좋은 의견으로 받아들여 길림성 안의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함께 농민호조사를 만들어 보자고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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