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시민항쟁의 승리로 그해 연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직선제 선거는 내게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주었다. 당시 나는 전국 3천여 명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대통령선거 공정선거감시인단’에 자원했다. 어렵게 얻어낸 세상을 바꿀 기회를 ‘부정선거’로 날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거주지인 서울 구로 갑 지역에서 활동했다. 차가운 눈바람을 가르며 며칠간 동사무소 직원과 함께 집집마다 방문해 투표대상자를 확인하고 부재자, 유령투표대상자를 골라냈다. 거주지에 없는 유령투표자가 꽤 많았다. 

선거날인 16일 나는 온수동 투표소에서 감시활동을 했다. 참관인과 함께 투표함을 지켰다. 오후 6시 투표는 마감되었고 곧 개표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녁 7시가 넘어도 선관위는 투표함을 가지러 오지 않았다. 8시쯤 되었을까. 김대중 후보의 평민당원들 몇 사람이 투표소를 찾았다. 당원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학생들 정말 수고가 많아요. 지금 구로 을 투표소에서 부정투표함이 발견되었답니다. 이제 승리는 우리 겁니다. 자 맛있는 거 사드세요.” 그들은 우리에게 적은 격려금을 주고 곧 투표소를 떠났다.
 
그들이 투표소를 떠난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투표함은 수거해가지 않았다. 개표방송은 아무 일 없는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초조하고 궁금했다. 밤 11시쯤인가, 구로구청이 부정투표함을 보관하며 농성을 벌이는 수천 명의 시민들로 가득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택시를 잡아타고 구로구청으로 갔다. 택시 기사는 “학생들이 좋은 일 한다.”며 택시비도 받지 않았다.

이미 구청과 그 주변은 수천 명의 시민과 대학생들이 해방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구로 을 투표소에서 부정투표함으로 추정되는 투표함을 공정선거감시인단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보호하는 현장이었다. 경찰 진압에 대비해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도로를 막고 방어막으로 쳤다. 구청 앞마당에선 “부정선거 원천 무효” 함성과 집회가 이어졌다. 군데군데 놓인 드럼통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녹일 불을 지펴놓았다. 
 
다시 투표소로 돌아와 17일 아침 6시까지 투표함을 떠나지 않았다. 개표방송은 계속되었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귀를 때렸다. 우리 개표소의 투표함은 아직 우리 앞에 있었다, 개표소로 가지 못 한 채. 투표함은 선거 다음날 오후나 돼서야 수거해갔다. 개표가 다 끝난고 당선자 발표가 난 후에 가져간 것이다. 유권자로서 그렇게 대한민국의 첫 직선제 대통령을 맞았다. 그리고 며칠 전 <더 플랜>(2017, 최진성 감독)을 보았다. 
 
지난 2012년 18대 대선 이후 부정선거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설마 요즘이 30년 전과 같겠어?’라며 애써 외면해왔다. 그런데 <더 플랜>을 보고는 뭔가 세게 얻어맞은 듯 한동안 멍했다. 순간 나는 <트루먼쇼>(1998)의 짐 캐리가 된 기분이었다. 의심의 문을 발견하고 열지 말지를 고민하는. 지금도 나는 그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더 플랜>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중앙선관위는 “19대 대선 종료 후 더 플랜 제작팀의 요구가 있다면 조작 여부 검증에 필요한 범위에서 제3의 기관을 통해 공개 검증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투표함을 열기 전에 개표방송이 나간 지역 사례가 많고, 미분류 투표지에 유독 박근혜 지지표가 많이 나왔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체로 전문가들은 전자개표시스템이 보안에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고 본다.

전자개표 관련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19대 대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자발적인 공정선거 감시단체인 ‘시민의 눈’이 활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들은 선거감시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을 마련했고 참관인의 행동지침과 관련한 법령까지 상세히 교육시킨다고 한다. 대선 후보 검증도 중요하지만 내 표가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이다.

뭉치 유령표가 돌고, 강압, 공개 부정투표를 하던 시대는 지났다. 디지털시대의 최대 약점은 눈과 귀로 감각할 수 없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안과 밖을 나눌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더 플랜>은 ‘다큐멘터리’라는 문화의 이름으로, 무시하고 외면했던 눈에 안 보이는 조작의 기술과 구조, 그 가능성을 경고한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위대하다. 투표하는 자가 아니라 개표하는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의 말이 눈에 들어오는 2017년 장미의 계절이다.

 

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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