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최운산 장군 곁으로 막내딸 계순을 보내드립니다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인 계순 고모가 돌아가셨다. 한 달 전 간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고 남은 시간이 한 달 정도라고 했는데 그 한 달을 다 채우지 못하셨다. 노인들의 내일은 예측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동안 이곳저곳 아픈 데가 있었지만 노년이라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나이 들면서 귀가 들리지 않아 힘든 것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잘 견디셨는데 85세를 일기로 지상 여정을 마치셨다.

▲ 영정사진 속 고모는 아직 곱다.

이제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의 역사를 찾기 시작했는데!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의 역사가 진실을 찾아가는 첫 걸음을 시작했고, 대한민국의 첫 군대인 <대한군무도독부>와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해 만주 무장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을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막내딸 계순이 최운산 장군의 삶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는 걸 더 보셨어야 했는데.... 많은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계순 고모는 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곁으로 서둘러 떠나셨다.

고모는 품격 있는 할머니 모습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분이었다. 우리를 맞아주실 때도, 대문 앞까지 배웅하실 때도 언제나 외출복으로 다시 갈아입으시는 고모에게서 항상 고운 모습을 잃지 않았던 깔끔한 성품의 할머니를 느낄 수 있었다. 주름진 얼굴의 80대 할머니였지만 소녀 같은 맑은 감성을 지닌 계순 고모는 때와 장소에 맞는 복장으로 품위를 잃지 않으셨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를 기억하게 했다.

고모의 얼굴엔 열두 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화학공장에서 일하며 여섯 살 아래 동생을 부모 대신 돌보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공산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 계순은 독립운동가의 딸이란 사실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았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고모의 마지막 10년을 한국에서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

▲ 옥순, 영옥, 청옥, 계순 4자매가 나란히서있다. 뒤에 봉우, 봉학 오빠들이 서있는 사진이었으나 최봉우의 동생인 것을 숨기기 위해 사진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 옥순, 영옥, 청옥, 계순 4자매가 나란히서있다. 뒤에 봉우, 봉학 오빠들이 서있는 사진이었으나 최봉우의 동생인 것을 숨기기 위해 사진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살던 집과 땅을 한순간에 빼앗겨 버린 어린 고모와 삼촌은 문화혁명기를 지날 때 봉오동을 떠나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개산툰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화학공장에 다녔던 고모는 여섯 살 아래 남동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자신의 당안(호적 서류)을 몰래 수정해서 빈농으로 고쳤다. 중국에서 지주의 자식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누나의 목숨을 건 모험으로 신분을 빈농으로 고친 막내삼촌 호석은 우수한 성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직장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연변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1983년 KBS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사는 큰오빠 최봉우를 찾고, 3년 후인1986년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에 오셨을 때 처음 만난 고모가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고모의 모습에 참 기뻤다. 핏줄이 이런 거구나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동과 함께 어쩌면 내가 나이 들면 고모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엄마를 많이 닮은 고종사촌 동생들에게서도 그런 핏줄의 정을 느낀다.

▲ 10대의 호석 삼촌과 계순고모, 평양에 살던 옥순고모와 조카 찰호가 함께
▲ 10대의 호석 삼촌과 계순고모, 평양에 살던 옥순고모와 조카 찰호가 함께

2001년 최운산 장군의 큰아들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막내아들인 호석삼촌이 연금 수급자가 되셨다. 그런데 독립유공자 유족연금은 나이순으로 승계 받게 되어있다. 손위인 계순 고모가 한국에 나오셨으니 수급자가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고모는 한국에 정착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남동생을 위해 수급권을 양보하고 본인은 가난한 기초생활수급자의 삶을 선택하셨다.

자식들이 외삼촌에 대해 서운해 하지 않도록 잘 정리하셨고 고종 사촌들도 어머니의 뜻을 잘 받아들였다. 유족연금 때문에 사이좋던 형제들의 의가 갈라진 집안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데 계순 고모의 결단이 존경스러웠다. 1986년 첫 방문 후 바로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1989년 독립군의 후손으로 국적을 취득해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호석삼촌과 달리 계순고모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돌아가실 때까지 연변 개산툰에서 사셨다.

엄마보다 먼저 한국에 정착한 딸들의 요청으로 2005년에야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서울살이를 시작하셨다. 한국에 정착하면서 고모가 선택할 수 있었던 주거공간은 방 하나가 전부인 4~5평 남짓한 허름한 다가구 주택이었다. 최운산 장군이 살아계실 때 동네에서 제일 큰 집에서 식구들과 온 동네 사람들이 어울려 매일이 잔칫날 같은 집에서 살았던 계순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서울의 한 단칸방에서 소박하고 빈곤한 노년의 삶을 이어가셨다.

고모는 한국에서 지내는 10여 년 동안 건강하게 생활하셨다. 가부장적이고 강한 성격의 남편과 시어머니 시집살이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지만 그 모든 일을 잘 감당하신 후에야 한국행을 택하셨고 자식들과 함께 비교적 편안한 노년을 보내셨다. 중국에서는 잔병치레도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착한 자식들이 마음을 모아 어머니를 잘 돌봐드려선지 많이 아프시지도 않았고 외로움을 타지도 않으셨다. 특히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둘째 딸과 사위가 매일 드나들며 생활을 도와드렸다.

▲ 최근 계순 고모의 모습

그런데 지난해 설날 인사드리러 갔을 때 고모는 당신이 몸이 약해 늘 골골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고, 어쩌면 이번 설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고모가 어릴 때 우리 집안의 여러 앞일을 미리 알려주는 분이 계순 고모가 85세까지 살 거라고 했는데 벌써 그 나이가 되었다고, 그동안 한국에 나와 잘 지냈으니 더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정정하신 고모의 말씀에 우리는 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 예언보다 5년을 더 사셨으니 고모도 앞으로 5년은 더 사실 거라고 답하며 웃었다.

사실 80세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도 어릴 때 당신의 수명이 75세라는 예측을 기억하셨다. 선대 어른들이 대부분 60을 넘기지 못하거나 60대에 돌아가셨으니 당신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일흔을 넘겨 살고 있으니 대단한 일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는 그분이 예측했던 아버지의 75세 생일을 기념해 함께 가족사진을 찍으며 생신을 축하했고, 그 후로도 5년을 더 사셨다. 고모에게 그 말을 해준 사람과 같은 분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에 대한 예언이 틀렸으니 고모도 앞으로 5년은 더 사실 거라며 함께 웃었는데 고모가 정말 85세에 돌아가셨다.

▲ 기념사업회 창립식에서 후손들이 모두 모였다. 앞 줄 가운데 최호석, 최계순과 뒤로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서있다.
▲ 기념사업회 창립식에서 후손들이 모두 모였다. 앞 줄 가운데 최호석, 최계순과 뒤로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서있다.

작년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설립과 창립식 날짜를 의논하면서 고모의 그 말씀이 생각났다. 물론 금방 나빠질 건강상태는 아니었으나 최운산장군의 자식인 계순고모와 호석삼촌이 함께 하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했다. 가능한 빠른 날짜를 선택했다. 2016년 7월 4일 두 분을 모시고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아온 고모와 삼촌 두 분이 살아계실 때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최운산 장군의 의 역사 찾기를 시작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랬는데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고모가 먼저 할아버지 곁으로 훠이훠이 떠나셨다. 시간을 끌지 않고 기념사업회를 창립했고, 봉오동에 다녀왔고, 손자들이 함께 가서 증조부 묘소에 비석을 세울 수 있었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모가 계실 때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고모가 그 소식에 기뻐하셨고 조카들을 대견해 하셨던 것이 우리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 화곡동성당에서 치러진 아름다운 장례미사
▲ 화곡동성당에서 치러진 아름다운 장례미사

돌아가신 할머니가 열심히 성당에 다니셨다는 것을 알게 된 고모가 한국에 나와 천주교 신자가 되셔서 천주교식 장례미사로 고모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의 장례문화에 서툰 고종사촌들이 많은 사람들의 기도 속에 어머니를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다. 최근엔 귀가 들리지 않아 신앙생활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사를 집전한 본당신부님께서 한국인들은 모두 최운산 장군의 따님인 최계순 마리아의 삶에 얼마간 빚을 지고 있음을 말씀해주셨다. 정말 그랬다. 독립투사 아버지로 인해 간난신고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을 보내드리는 아름다운 장례미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고모의 장례를 치르며 누구나 비켜갈 수 없는 죽음이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으로 기억될 수 있을지,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깊이 묵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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