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16.  오직 한 마음

한편 1929년에는 수많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주 나쁜 일만을 당한 한해였다.󰡔만주의 호랑이󰡕라 불리던 김좌진이 이듬해 봄에 공산주의로 사상을 바꾼 자신의 부하에게 산동성 산시역에서 피살된 것을 비롯하여, 정신은 길장선 화피역에서, 김동진은 중동선에서 각각 피살이 되어 한국독립당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지도자를 잃은 동포들은 뭉쳐서 살아갈 길을 잃은 것이다.

동지 이원일과 함께 체포된 김동삼은 하얼삔에서 90일간이나 구금되어 있다가 신의주 감옥으로 옮겨졌고,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의 거물이며, 애국지사인 김동삼에게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다 하였다. 그에게는 밖에서 넣어주는 우리 동포들의 정성이 담긴 밥이나 옷, 그리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이 없도록 챙겨서 넣어주었으나, 일체의 물건이 전달되지 않았으며, 거물급의 독립투사를 잡았으니 자신의 공을 자랑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서 이런 기회에 독립군들을 깡그리 없애 버리려고 일송에게 온갖 고문을 다했다. 전기 찜질과 양팔을 등뒤로 묶어서 거꾸로 공중에 매달아 놓고서 코에 물을 부어 넣는 등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갖가지의 악형이 가해졌다. 그러나 핏물이 흥건히 고인 고문실에서도 이 모든 것이 나라 잃은 민족을 대신하는 수난이요, 피값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도 굽히는 일이 없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악형을 가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나라 잃은 슬픔보다는 가볍다. 내 몸이 도막 쳐지고 살점을 저며 내어도 이 아픈 가슴만큼은 아프지 않을 것이다. 내게서 어떤 정보를 얻으려고 생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친다 해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니 함부로 다룬다고 무얼 얻으려는 생각은 말아라. 이 천인공노할 일본 놈들아.....”

소리를 지르던 일송은 그만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까무라치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함께 고생한 동지들의 이름을 댈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침내 평양으로 옮겨져 평양복심 법원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얼마 후에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옮겨졌다. 이곳에서는 동지들이 들여준 책을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만주의 밀림 속에서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그의 강인한 의지와 행적은 간 곳이 없고, 벌써 중년이 다된 나이인데다가 일제의 악랄한 고문에 망가지고 시달린 몸은 결코 건강 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그렇게도 바라던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루어낸 자주 독립'을 끝까지 이루어내지 못한 독립운동을 생각하면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 되어갔다. 20여 년간이나 만주벌판을 누비며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던 우리의 위대한 독립지사 일송은 옥살이 8년 만인 1937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하는 수 없는 일제는 가족에게 연락을 하여 만주에 있던 아들 정묵, 용묵 형제가 찾아왔다.

'내가 죽어도 뼈를 묻을 땅이 없으니 유골을 불살라서 재를 만들어 한강에 띄우면 영혼이 동해 바다에 떠돌다가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지켜보겠다.' (경사유방)

이것이 일송이 옥중에서 남긴 유언이었다.1937년 3월 3일(4월 14일?) 차디찬 감옥에서 나라를 위한 일생을 마치니, 그의 나이 60세였다. 일제는 일송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않았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것은 물론 모든 국민에게 그들의 침략전쟁에 협력을 하도록 강요를 하던 때였으니, 그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있었다. 이때 한 간수가 이원혁에게 몰래 알려 류주희와 함께 감옥에 가서 엄중 항의 끝에 시체는 인수받았으나 장례를 모실 길이 없었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달려와서

“내 이 어른을 내 집에 뫼 시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다.”

고, 하면서 자신의 살고 계시던 성북동의 심우장(서울시 지정 문화재)에 서둘러 안치하였다. 이 소식이 몰래 몰래 전해지자 서울에 살던 옛 동지와 알고 있던 사람들이 40여명이나 심우장에 모여서 며칠 밤을 빈소를 지키며 예를 갖추어 장례절차를 마치고, 본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여 그 유골을 한강에 뿌렸다.

시인 조지훈은 일송선생 추모시에서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일송선생 추모가 일부 조지훈시, 이강숙곡>

독립기념관의 임시정부 관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의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맨 윗줄에 깡마른듯한 얼굴에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일송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혜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이 시를 쓰고 조두남이 곡을 붙인 이 곡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민족의 정서가 베인 곡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노래는 일송선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거친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일송선생이야 말로 우리 대한민국이 있게 한 기둥이요, 선구자이시기 때문이다.

일송선생은 비록 조국의 독립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가셨지만,1962년 3월 그가 그렇게 바라던 조국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기념관을 들어서면 겨레의 탑을 지나 광복의 큰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쪽으로 산책로를 따라 구국의 다리 쪽으로 약 20여m 쯤 가면 폭 1.5m 높이 약 3m 정도의 하얀 화강암에 새겨진 일송선생의 어록비가 서 있다. 이 비는 선생의 종중인 의성김씨 중앙종친회(당시 회장 김재춘)에서 세운 것으로 선생의 마포감옥에서 남긴 말씀을 아로새긴 것입니다.

▲ 독립기념관 입구 다리 좌측에 서 있는 일송어록비.어록비 제막식에 참여한 사진이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구글 이미지로 씁니다.

비문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一松 金東三선생 어록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가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마포 감옥 옥중 유언에서-

이 한 말씀 속에 그의 일생을 바친 조국을 위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평생을 오직 나라만을 위하여 바치시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시지 못한 한을 이렇게 달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찬 애국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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