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나는 일행을 형무소로 안내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정미7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사법권이 일제에 강탈당한 후 1908년 10월 21일 '경성' 감옥이란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1945년 서울형무소로, 1961년 서울교도소로,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서울구치소가 이전됨에 따라 1998년부터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광복 전에는 한 많은 독립투사들이 수감되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광복 후에는 민주화운동관련 인사들이 수감되어 또한 형언할 수 없는 수난을 당했던 곳이다.

시간 관계상 건물 안으로 안내할 수는 없었다. 형무소 울타리를 따라가면서 이곳 수형자들의 면면을 살피는 것으로 대신했다.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의암 손병희, 만해 한용운, 의병대장으로 경성감옥 사형수 1호가 되었던 왕산 허위, 불과 17세의 나이로 순절한 유관순열사, 만주벌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 장군 등, 그밖에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 기라성 같은 독립투사들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용자를 보여주셨다. 그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어떻게 지켰을 것인가!

우리들은 남쪽 울타리 너머 격벽장을 건너다보았다. 각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하여 수감자들이 운동할 때 서로 대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감시가 용이하도록 여러 개의 칸막이벽(격벽)으로 만들어진 운동 시설이다. 이것 또한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제레미 벤담이 창안한 파놉티콘 구조로 부챗살 모양이어서 우리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를 연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일본이 재빨리 서구문명을 수용할 때 조선의 우리 선조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 가문의 부귀와 축재에 여념이 없었던 외척세력들은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했겠지요.”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청중을 향하여 부질없는 자문자답을 하며 울분을 달랬다. “그러게 말이에요.” 참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응했다.

▲ 통곡의 미루나무

나는 저 유명한 ‘통곡의 미루나무’를 가리켰다. 수감자들이 출옥자로 호출되면 지긋지긋한 옥살이를 마친다는 기대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출입구인 동쪽으로 데려가지 않고 서쪽으로 데려가면 삽시간에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절망에 몸부림치게 된다. 서쪽에는 사형장이 있기 때문이다. 사형장 바로 앞에 우람하게 서있는 나무가 ‘통곡의 미루나무’다. 아무 것도 모르고 호출되어 나온 수감자들은 비로소 사태의 진상을 깨우치고 그 나무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의 눈물을 받아냈을까?

그 나이테에는 독립투사들의 한과 민주투사들의 한이 고스란히 새겨져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형수들의 단말마를 지켜보느라 나무 또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어느덧 노쇠의 빛이 역력하다. 날이면 날마다 뼈저리게 서러운 사연을 듣고 마지막 이승을 하직하는 가엾은 영혼들을 달래느라 가슴에 피멍이 들고 사지는 마비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해가 갈수록 급격한 노화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피골이 상접하고 주름살은 더께더께 전신에 자상을 긋고 있다. 애처로운 일이다.

사형장에는 배석자용 의자가 있고 사형수가 앉는 의자가 있다. 교수대는 교수형집행을 위한 개폐식마루판과 교수줄, 가림판 뒤쪽에 있어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레버장치로 구성되어있고 마루판 아래 지하에는 시신수습실이 있다. 시체는 고문의 흔적을 지우고 사형집행 사실을 감추려고 사형장 밖 시구문을 통하여 몰래 반출하여 홍제동화장터로 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오는 날이면 통곡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전해졌던 장소도 이곳이다.

 ► 국사당(國師堂)

우리는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무악동 뒤 인왕산을 오른다. 가파른 길이다. 인왕사 일주문을 지나서 맨 먼저 국사당(國師堂)에 당도한다. 1925년 일제의 조선신궁이 완성되자 목멱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헐어버렸는데 그 목재를 가져다 이곳에 재건한 것이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이다. 조선시대의 국사당은 목멱대왕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조선왕조의 신사였지만 지금의 것은 그냥 당주가 유료로 운영하는 굿당, 즉 무당집이다. 그래도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있다.

▲ 국사당

국사당 내부에는 단군, 조선 태조 이성계부부, 칠성신(七星神), 최영장군의 신인 신장(神將), 천연두와 관련 있는 별상신과 호구아씨, 점술과 관련된 곽곽 선생, 예능의 신인 창부, 민중전, 산신령 등의 무신도가 벽에 걸려있다.

나는 국사당에 대해서보다는 한국의 고대민속신앙인 무속신앙에 대해서 참가자들에게 몇 가지 상식을 알려주는데 주력했다. 무속신앙의 기원은 통치자와 관계된다.

무속신앙은 즉 샤머니즘(Shamanism)이다. 샤머니즘의 전통은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각 나라가 모두 비슷하다. 그러면 샤머니즘이 도대체 뭘까?

샤머니즘은 샤먼(Shaman)이 주재하는 신앙이다. 샤먼은 초자연적 존재와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특별한 존재로서 청동기시대에 신수(神樹) 또는 신목(神木)이라는 나무에 올라가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지상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신수는 고대의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에서 제사를 지냈던 성역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샤먼은 청동기시대에는 통치자와 동일인이었다. 동북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또는 한대지방에서 흔히 자라는 자작나무가 신수 또는 신목이었다. 현재 당산나무, 서낭나무도 신수의 유풍이다.

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왕검의 예를 들어보자. 조선의 경우 신단수(神檀樹)는 박달나무를 말하는데, 그것 또한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단군왕검이 그 나무 아래서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단군(檀君)은 샤먼으로서 신단수에 올라가 제사를 올리는 제주(祭主)이고, 왕검(王儉)은 통치자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일인이역이었다.

그러나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샤먼의 신분은 신녀(神女) 또는 영매(靈媒)로 바뀐다. 즉 제사장과 통치자의 신분이 분리되는 것이다. 신녀 또는 영매는 순결한 처녀여야 한다. 순결을 잃으면 신녀나 영매의 자격을 잃는데 결혼할 수도 없다. 신수에 올라가 샤먼이 외치는 말이 후일 시가 되고, 그 거창한 몸짓은 무용의 기원이 되었다.

 ► 선(禪)바위

국사당 바로 위 서편에 있는 선(禪)바위로 올라갔다. 선바위는 서울시 주요민속자료 제 4호이다. 시커먼 바위 둘이 나란히 서있는데, 높이가 7~8m, 가로 11m, 폭이 3m쯤 되는 우람한 바위다. 얼른 보면 괴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민머리를 하고 장삼을 걸친 탁발승의 모습과 흡사하다.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승려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선(禪)바위」라고 하고, 항간에서는 장삼바위라고도 한다.

가까이 가보면 바위에는 풍화작용으로 길고 둥근 구멍이 잔뜩 뚫려있어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바위를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빈다. 특히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이어서 기자암(祈子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엇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바위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어 예전에는 이성계부부바위라고 하기도 하고, 이성계와 그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사이좋게 서있다고도 했다.

선바위에는 재미나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 초 도성 성곽을 쌓을 때의 이야기다. 국사당 위에 있는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넣을 것인가, 도성 밖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불교를 상징하는 선바위가 마땅히 도성 안에 있어야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학자인 정도전은 도성 밖에 있어야 불교가 쇠미해지고 유교가 흥왕하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결정권자인 태조 이성계는 그들의 주장에 결정을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왕사였고, 또 한 사람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개국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눈이 내렸다. 이성계는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가자는 정도전의 제언을 듣고 그와 함께 현장답사에 나섰다. 그때 오늘날의 도성 성곽 안쪽에만 눈이 녹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태조는 이 현상을 하늘이 내린 계시라고 생각하고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의 경계선을 따라 성곽을 쌓게 했다. 그러니까 자연히 선바위는 성 밖에 남게 되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제 중들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의 예언대로 승려들은 조선시대 내내 도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한양도성의 경계를 눈 때문에 결정지었다고 하여 눈 설(雪)자가 들어가는 눈 울타리, 즉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ㄹ 받침이 묵음 화되어 서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서울 성곽을 '설성(雪城)'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내 옆에 바짝 붙어서있던 50대의 여성참가자가 “믿거나 말거나”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나를 비아냥거리는 줄 알고 언뜻 그녀의 태도를 살폈다. 웬걸, 그 얼굴에는 전혀 악의가 없는 맑은 미소가 서려있었다. 그 해맑은 미소가 나를 위무하지 않았다면 나는 기분이 상하여 오늘의 해설에 오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한마디는 해설의 타성적인 분위기를 일신하는 청량제가 되지 않았을까.

 

편집 : 양성숙 부에디터  사진 : 권용동 주주통신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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