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

얻기도 어렵지만 내려놓기는 더욱 어렵고 힘든 것이 돈과 권력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세우거나 권력을 잡게 되면 으레 뒤따르는 것이 논공행상이지요. 권력을 잡기까지 비바람 맞으며 노심초사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걸었던 지난날들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논공행상(論功行賞)은 공로를 따져서 상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상왕조(은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공신들과 의논을 하여 망한 상나라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상나라 왕의 아들을 제후로 삼아 수도 은을 다스리게 하였고, 주왕을 따랐던 개국 공신들에게 공의 크고 적음에 따라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사이며 일등 공신인 강태공 여상에게는 제나라를 봉읍으로, 주공 단에게는 노나라를, 소공에게는 연나라를 떼어 다스리게 하였고, 그 외에도 서열에 따라 봉읍을 주는 봉건제를 실시합니다. 생사를 같이 하였으니 땅을 서로 나누어 부귀영화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하고 아름답겠지만, 어디 이상과 현실의 끝이 같던가요? 틈만 나면 옆의 땅 한 뼘이라도 더 갖고 싶고, 창고에 하나라도 더 쌓아두고 싶은 게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마음. 결국 각각의 제후국들이 패권을 놓고 전쟁을 치르며 춘추 전국시대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진시황에 이어 재차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도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지요. 공을 세운 서열에 따라 20명에게는 열후에 봉하고 봉읍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서열부터는 서로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을 못하고 있었지요. 서열에서 밀리는 장군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지고, 점차로 자기들은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갑니다. 그러한 불안감이 반란을 모의하는 지경에 이르지요.

자방 장량을 통해 이를 알게 된 유방이 장량에게 대비책을 묻습니다. 장량이 대답합니다. “폐하가 제일 싫어하는 신하가 누구입니까? 모든 군신들이 짐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유방, 두 번 생각할 거 없다는 듯 바로 “옹치!”라고 대답합니다.

유방이 패현과 풍읍을 근거지로 거병을 하여 초기에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호족출신인 옹치에게 풍읍을 맡겼는데, 옹치는 위왕에게 항복을 하고 풍읍을 바쳐버렸습니다. 전쟁에서 보급은 승패를 가름하지요. 거병 초기 풍읍을 잃고 유방은 물자부족으로 엄청 고생을 합니다. 나중에 2강인 초한이 자웅을 결할 때 옹치는 다시 유방에게 항복을 하였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한 인물입니다.

장량은 그 옹치에게 상을 내리라고 조언을 하지요. 유방은 옹치에게 적지 않은 2천 5백호의 봉읍을 내리지요. 그러자 불안으로 반란을 모의하던 장수들이 잠잠해졌습니다.

논공행상이 승자에게는 전쟁 못지않게 어려운 일입니다. ‘[대만이야기4]한식과 개자추’에서 언급한 개자추는 논공행상에서 빠진 후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들어갔다가 죽기도 하지요.

이 논공행상과 왕권강화는 대개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주나라도 결국 제후들의 힘이 커지면서 망했고, 외척들이나 군벌과 같은 다른 강력한 힘이 나타나면 왕권은 힘을 잃게 되지요.

그래서 논공행상 후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피를 흘리게 됩니다. 한나라 건국의 최대 공신인 한신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아마도 피를 흘리지 않고 마무리 지은 가장 이상적인 논공행상은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일 것 같습니다.

▲ 송나라 태조 조광윤(927년 3월 21일-976년 11월 14일) 초상출처: WIKIPEDIA

송나라의 앞선 왕조 당나라는 안록산, 사사명 같은 군벌(절도사)들의 전횡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황건적의 난으로 나라는 실질적으로 망합니다. 주전충, 이극용과 같은 절도사 등과 공존하다가 5대 10국으로 갈라져 싸우지요.

조광윤의 아버지는 후당의 근위대장을 지낸 군벌 출신입니다. 어머니는 고관의 아내이면서도 사치를 멀리하고 겸손했으며 지혜롭고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런 현명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아들 조광윤은 많은 사람이 따르는 장군으로 성장을 하지요.

거란이 침범하여 원정길에 나선 조광윤이 개봉(開封)근처인 진교에서 숙영을 하였습니다. 평소 두주불사의 조광윤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군막에 있던 동생이 급히 깨워 취중에 따라 나섰더니 연병장에는 장교들이 도열해 있고 하나같이 “황제가 되어주십시오.”라고 외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부하들에 의해 황제의 용포가 입혀지고 말에 태워져 개봉으로 들어가 황제에 오릅니다. 그리곤 그냥 개봉을 수도로 정하고 송나라를 건국하게 되지요.(진교의 변)

정세가 안정이 되자 조광윤은 공신들을 불러 모아 큰 연회를 베풀고 술을 마시게 합니다. 주흥이 무르익자 시종들을 물리고 공신들에게 엄숙하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나는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없구려.”

장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어찌 다른 맘을 먹겠냐며 대답을 하자,

“당신들이야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부귀를 탐하는 부하들이 있을까봐 걱정이오. 어떤 부하가 당신들에게 황포를 걸쳐주면 거절하기 어렵지 않겠소!”

공신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물이 아니오? 돈을 넉넉히 줄 테니 권력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나와 친척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겠소!” 다음날 공신들이 입궐하여 모두 사직서를 내고 낙향을 합니다.

이로서 피를 흘리지 않고 군벌들의 세력을 중앙으로 복속시키고,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를 종식시키게 됩니다.

▲ 명나라 태조 주원장(1328년 10월 21일-1398년 6월 24일) 초상 고궁박물원 소장출처: WIKIPEDIA

반대로 피를 많이 흘린 황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입니다. 원나라 말기에 태어난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흑사병의 유행으로 가족들이 대부분 죽고 고아가 되자 절에 들어가 탁발승이 되어 떠돌지요. 홍건적에 가담을 하고 곽자흥이란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사위가 됩니다. 그 이후 1366년 스스로 명왕이라 칭했고, 1388년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점령하여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됩니다.

빈농의 아들이었고, 떠돌이를 하며 느낀 주원장은 관리들의 부패가 얼마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건국공신들을 무참하게 숙청을 합니다. 황후나 환관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고, 황후의 친족들도 월권을 하면 가차 없이 처형을 하고 말지요.

공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으며 황실을 안정시키려고 24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전국의 요지에 제후왕으로 봉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그 이후로도 끊임없는 숙청을 단행하여 3만 명이 넘는 신하들을 처형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왕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을 건국한 태종 이방원.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비의 아들인 이복동생 방번과 세자로 책봉된 방석을 죽이고 신권정치를 추구했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살해합니다. 어쩌면 평탄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르는 자신의 두 소생을 지혜롭지 못했거나 혹은 권력에 눈이 먼 신덕왕후 강씨가 나서서 죽인 꼴이 되었습니다.

▲ 조선 태종 이방원(1367년 6월 13일-1422년 6월 11일) 상상화출처: 나무위키

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에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도와준 공신들을 대거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을 합니다. 특히 계모에 의한 농단을 몸소 경험했던지라 처족에 대한 경계가 가히 병적인 듯합니다. 장인이 병사를 하자 네 명의 처남들도 다 죽이고 부인 민씨를 유폐시켜 외척의 개입을 원천 차단합니다.

후에 태종은 충녕(세종)에게 양위를 하고도 상왕이 되어 병권과 인사권을 행사합니다.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이 영의정에 올랐지만 동생 심정과 함께 역모 죄로 몰아 처형을 시켜서 소헌왕후의 힘을 빼지요. 덕분에 세종대왕은 외척의 준동 없이 국정을 살핍니다.

과욕은 항상 지혜의 눈을 가립니다. 서로 공을 다투고 권력에 연연하다 오히려 더 큰 화를 입기도 하는 것이 권력의 생리인가 합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