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에서 의거 진주성까지 진출하여 공을 세우다

3. 임계영<任啓英>장군의 창의 활동

임계영 장군은 할아버지가 판서<지금의 장관> 추서<실제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살아서 하신일 인정이 되어 죽은 뒤에 벼슬을 내리심>받을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할아버지 임광세는 관산군으로 추서 되었으며, 아버지 임희중<자:국담>님은 진사를 하신 분이었다.

임계영 장군<자:홍보, 호:삼도>은 1528년<중종 23년>에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서 태어나셨다. 타고나신 성품이 용맹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덕이 다른 사람들을 감싸안는 분이었다. 더구나 효심이 강하고, 친구들에게도 진심으로 대해 줌으로서 벗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이런 훌륭한 분이었으므로 군내에서 모든 선비들의 추천을 받아서 정철 전라도 감사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였다. 좀 늦은 나이인 4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서 진성현감이 되었다. 진성현감 시절 은혜를 베풀고 고을을 잘 다스려 현민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 현감이었다. 그러나 나라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권력을 쥔 신하들의 못된 짓거리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사직을 하고 귀향하여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나라가 위태로움을 늘 걱정하셨다.

사시던 마을이 가뭄에 시달리는 것을 보시고 가뭄을 막아내기 위해서 축내 앞들에 큰 방죽을 파고 막아서<축내대지> 그 가운데에 세 개의 섬을 만들고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삼도<세 개의 섬>이라고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이 침입하여 우리 국토를 짓밟아 갈 때에 임금님은 의주로 몽진<임금님이 서울을 떠나 피난을 가심>하여야 하였다. 이때에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임금님을 따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도 않고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보성에서는 큰 스승이신 박광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에 임계영 장군도 뜻을 같이하여서 능주 현령 김익복과 진사 문위세 등과 함께 보성관아에서 모임을 갖고 의병을 모집하여서 나라를 구하는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대장으로 추대된 임계영 장군은 박근효<박광전 선생의 장남>를 참모로, 정사제를 종사관으로 삼아서 의병대의 진용을 갖추었다. 임계영 장군은 보성 의병을 이끌고 순천으로 진군하여서 순천을 지키고 있던 장수 장윤을 부대장으로 삼고, 수천 명의 병사와 말을 앞세우고 남원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남원의 부사 윤안성은 남원에 있는 많은 군사와 무기를 협조하여 주었다. 이렇게 되니 당당한 군사들로 정비가 되었으며, 호[虎]자를 표장<군기>으로 삼았으며, 전라도 좌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다. 다시 말해서 호랑이 [虎]자 군기를 앞세운 전라좌수영 쪽의 의병대장이 된 것이다. 이어서 전라우의병장인 최경회와 힘을 합쳐서 적의 진격을 막아서니 감히 적들이 다가서지 못하였다.

이 때 적 주력부대의 가장 선두부대와 싸우느라 힘겹던 영남의 초유사 김성일이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장군은 곧 신의주에 계신 임금님께 상소문을 보내고 나서, 영남으로 출발하였다. 영남 땅에 들어서서 성주, 개령, 함양, 삼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를 하였다. 임계영 장군이 합천으로 이동을 하자 왜군들이 다시 성주와 개령을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싸우던 영남의병들이 왜군에게 밀려 힘든 싸움을 할 때에 임계영 장군이 다시 왜적들을 쳐서 영남의병들을 구하는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성주에서 적들을 전멸 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적장 모리휘원<毛利暉元>이 졸병 몇 명과 함께 도주를 하는 것을 소상진과 남응길 두 사람으로 하여금 뒤쫓게 하였는데, 그만 두 장수가 모두 적의 총탄을 맞아 순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하는 것으로 슬픈 전투는 끝이 났다.

계사년 2월 들어서 부상현에서 적을 추격하여 4백여 명을 전멸 시키고, 왜군들에게 붙잡혀 있던 남녀 400여명을 구출하였다. 6월에는 창의사 김천일 등 여러 의병장과 진주로 입성키로 한 임계영 장군은 먼저 부장 장윤을 입성케 하고, 뒤에서 군량과 무기를 조달하여 뒤따르기로 하였으나, 장군은 적에게 포위되어서 입성 할 수 없게 되었고, 진주성은 적에게 함락 되어서 부장 장윤을 비롯하여 진주성을 지키던 우리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진 것으로 무너지지 않고, 장군은 남은 병력을 다시 모아서 최억남을 부대장으로 삼아 전쟁에서 중요한 지점들을 지키면서 참봉 이굉중으로부터 군사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 받아서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이해 10월에 일단 전란이 평정되었고, 선조 임금님이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장군은 임금님께 우리 군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점과 진주성이 함락하게 된 것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갑오년 정월에는 전주에 주재하시는 동궁인 광해군의 명을 받들어 변장을 하고 하동으로 몰래 숨어든 장군은 일본 패잔병 여러 명을 토벌하였다. 4월에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서 각도의 의병들과 함께 충용장 김덕령 장군의 부대에서 참모로 활약하다가 병신년부터 벼슬길에 올라 양주, 정주, 장단, 해주, 순창 등의 목사를 역임하셨다.

1597년 정유재란에는 적을 무찌르는 선봉에 서지 못함을 아쉬워하시다가 전란 중에 70세를 일기로 동복 유마산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신 뒤에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추서 받으셨으며, 나라를 위한 충성스런 장수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의 후손들은 공이 쉬시고 사시던 귀산촌의 뒷산에 여러 간의 천석정<泉石亭>을 세웠으나, 너무 오래 되어 낡고 허물어져 지난 임인년에 12대 후손 태정이 중건을 하면서 귀산정<龜山亭>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유학을 하는 분들이 모여서 충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선생을 받들어 모시는 계를 만들고 모임을 가지고 있다.

공의 신도비는 묘소가 있는 율어면 자모리 자모악에 세워져 있다.

▲ 三島 任啓英 將軍 記念事業 鳥瞰圖(장흥 임씨 대종회 카페에서)

<참고 : 湖南節義錄. 山陽三綱傳, 寶城郡誌, 三島實記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글 출처 : 전자책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저자 김선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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