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19. 빛나는 형제 최진동과 최운산 2

최성주 주주통신원l승인2017.06.05l수정2017.07.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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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주주이며 '문화공간:온'의 월요영상팀인 최운산장군의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자 주]

너그러운 성품의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후손들이 페미니스트로 기억할 만큼 교육을 비롯한 생활문화 전반에서 딸에 대한 차별이 전혀 없으셨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면모를 지닌 최진동 장군은 딸들은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고 형님을 앞세우는 동생들의 헌신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셨다. 개인적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앞서는 열린 생각을 지녔던 최운산 장군이지만 형님 앞에선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았다.

셋째 치흥도 형님들이 먼저 시작한 일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전력투구했다. 그저 의좋은 형제들이 우애를 나눌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전쟁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전투현장에서 형제들의 일치와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무엇보다 큰 힘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최진동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 

최진동 장군은 전처가 낳은 딸 둘과 아들 셋 외에 후처에게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더 두어 모두 여덟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는 세 아들의 이름을 국신國臣, 국량國良, 국빈國斌으로 지었다.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에 모두 나라 國자를 쓸 만큼 민족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했다. 큰아들 국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넘어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잘 생기고 똑똑한 젊은이였다. 그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몇 천 명에 이르던 동지들을 잃었던 '자유시참변'을 겪고 돌아와 어려움 속에 무장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시 다지던 최진동 장군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큰아들의 선택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닮은 강직한 성품의 국신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충돌 이후 큰아들 국신이 병이 났고 1년여를 앓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큰아들이 죽던 날 며느리마저 어린 딸 하나를 남긴 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숨처럼 아끼던 큰아들과 며느리를 동시에 잃은 최진동 장군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사촌동생인 아버지는 국신 형님이 정말 멋진 젊은이였다고 회상했다. 큰아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지녔던 최진동 장군은 오랫동안 애통해 하셨다.

어린 손녀는 최진동 장군의 극진한 돌봄 속에 자랐다. 부모 없이 자란 손녀딸이 남편의 사랑이라도 많이 받기를 바라며 예단을 세 수레나 실어 보내며 열여섯에 혼인을 시켰다. 강이 가까운 도문 소하구에 살아서 물난리가 나면 신랑이 업어서 건네주곤 했다는 그 손녀는 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 폐병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사망하고 말았다.

어려운 시대, 가정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많았지만 최진동 장군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동생들과 함께 북만주 일대를 다니며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부대를 재창설했고 새로운 터전을 다졌다. 둘째부인의 소생 중 큰딸인 경주 당고모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지낸 추억을 많이 전해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새로운 내용은 홍범도 장군과 한한 일화들이다. 32년생인 최경주는 홍범도 장군을 어릴 때 몇 번 만났다고 한다.

역사는 홍범도 장군이 연해주로 들어간 이후 그곳에 계속 머물렀고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후에는 간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경주 당고모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은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러낸 동료로 승리의 기쁨도, 실패의 아픔도 함께 나누던 사이였다.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하기 전 연해주에 머물던 홍범도 장군이 여러 번 봉오동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홍 장군이 최진동 장군의 도문 집에 방문했을 때 어린 경주가 홍범도 장군의 무릎에서 놀았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경주를 예뻐하면서 봉오동에 들어와 북로독군부에 합류했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곤 했다. 당신이 소싯적에 유명한 포수였던 이야기, 몇 십 명의 부하를 데리고 봉오동에 들어왔지만 최진동장군을 만나 함께 큰 부대를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주 당고모는 홍범도 장군을 아주바니(큰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경주고모는 한동안 못 만났던 홍범도 아주바니를 봉오동의 집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1941년 최진동 장군이 돌아가신 다음해 가을이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1942년 당시 열한 살로 어머니를 도와 가을 추수를 위해 봉오동 집에 들렀는데 오빠 국량은 보이지 않고 홍범도 아주바니가 혼자서 마루에 앉아서 옷을 꿰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늙고 이빨이 빠진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경주가 반갑게 인사하며 “아주바니,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여기 어쩐 일이시냐?”고 묻자 “너희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이제 내가 여기 있어야지... 여기가 내 집이야”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경주는 조밥과 감자, 된장찌개를 끓여서 밥을 차려드렸다. 홍범도 장군은 맛있게 드셨고 경주는 저녁이 되어 도문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경주 당고모는 이후 홍범도 장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크질오르다에서 순국했다. 홍범도 장군이 다녀간 그 다음해인 1943년에 봉오동에 큰 홍수가 나서 봉오동 집이 다 무너지고 토성도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주 당고모한테 처음 들은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역사학자들은 노년의 노인이 그 먼 길을 오갔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당고모가 다른 사람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내가 다시 확인을 요구하자 경주고모는 “내가 열두 살이나 먹었을 때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릴 때 아버지랑 같이 만나서 그분 무릎에서 재롱떨던 내가 어떻게 홍범도 아주바니를 모르겠냐”고 했다. 당고모는 덧붙여 "아버지는 "안무장군과 홍범도장군이 우리 형제들과 뜻이 잘 맞아 봉오동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무 장군이 당신의 심부름으로 독립군의 유족들에게 생활비 전달하러 갔다가 봉오동에서 멀지 않은 달라재에서 총을 맞고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고 전했다.

'자유시참변'의 고통을 가슴에 품고 봉오동으로 돌아온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은 북만주를 넘나들며 제2의 봉오동을 건설하는 일에 진력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당시는 이미 만주가 일본의 지휘 하에 있던 시기여서 모든 활동을 비밀리에 해야 했다. 연변 대흥구(대황구), 3만 정보 면적의 임야에 독립군부대를 재창설하고 50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숨어서 지냈다. 농사꾼으로 변장한 독립군들이 낮에는 군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편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했다.

‘자유시참변’으로 대부분의 동지들을 잃었지만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고 그곳을 떠났던 최운산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참변을 피해 살아남았고 이후 새로운 부대 구성에 주축이 되었다. 살아남은 군무도독부 군사들은 여전히 강했다. 만주의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가 독립군이었다가 일본에 투항한 귀순자들의 명단을 살펴본 적이 있다. 

1919년 임시정부 출범과 함께 독립군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었고 봉오동·청산리 전쟁을 치르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확신했던 열정적인 시기가 있었다. 그 이후 독립군부대가 연해주로 이전하고 '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 등 험난한 과정을 겪게 되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본에 투항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귀순자 명단에는 그들이 속해 있던 원 부대명이 같이 적혀 있었는데 국민회군,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등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부대 출신의 귀순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책으로 정리될 만큼 숫자가 많았다 당시 독립군의 숫자가 제일 많았던 부대는 군무도독부였다. 그러나 군무도독부 출신의 귀순자는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군무도독부군은 그만큼 군율이 엄격하고 잘 훈련된 정예부대원들이었다.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 계순은 어릴 때 아버지 최운산 장군이 늘 동지들이 있는 삼림에 가셨고, 외부활동을 많이 하셨던 탓에 집에 계셨던 적이 거의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기억은 사촌간인 경주의 기억과 일치한다. 경주 당고모도 최진동 장군이 삼림의 동지를 만나러 자주 갔다 오시곤 했다고 전해주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최운산 장군이 훨씬 더 오래 집을 비우셨고, 몰래 변장을 하고 밤에 다녀가시곤 했기 때문에 계순은 아버지와 살갑게 놀았던 추억이 많지 않았지만 한 살 위의 경주는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이 많았다. 일본군의 감시가 심했던 최진동 장군은 일부러 어린 딸을 앞세우고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최진동 장군은 때가 되면 두만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총독부를 칠 것이라고 경주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린 딸에게 들려주었던 희망사항은 일본군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무장독립투쟁의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기였고, 대규모 병력이 삼림 속에서 훈련을 계속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경주 당고모는 최진동 장군이 “도독부군은 조직망이 철저한 용사들이다. 도독부군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한 애국 동지들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전해주었다.

오랜 기간 훈련 양성된 정예부대원인 군무도독부군이 남아있었기에 1930년대 이후에도 우리 독립군들이 주도적으로 여러 전투에 참전할 수 있었다.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가 규모도 크고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지만 그것만으로 만주 독립전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아버지가 1960년대에 최운산 장군의 서훈신청서에 중요한 활동으로 기록한 전투경력에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우수리강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아직 가족의 증언으로만 존재한다. 1930년대 전후의 만주 독립군 활동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대규모 전투 중 하나인 1933년의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한 사실조차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최운산과 최진동 형제는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한 탓인지 최진동 장군은 글을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일찍이 중국인들과 교류한 탓에 중국말에 능통했고 글을 모르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실질적 부대 운영과 모든 관리를 도맡았던 최운산 장군이 글을 모르는 형님을 완벽하게 보필했다. 

독립군부대를 창설하고 생사를 넘는 전투를 이끌면서 최운산장군은 언제나 형님인 최진동장군을 절대적으로 앞세우고 뒤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최운산장군이 일본에 붙잡혀 투옥된 얼마 후 최진동장군도 거짓 정보에 속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한 집에 살면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으나 최진동 장군이 재혼 후 도문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두 형제의 생활방식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감시와 회유 작전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제는 만주 무장독립군을 대표하는 최진동 장군을 감시하기 위해 옆집에 3층 건물을 지어 요정으로 운영했다. 3층에서 바라보면 집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게 되었다. 자연히 동지들과 연락도 어려워졌고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일제는 많은 땅과 재산이 있는 최진동 장군에게 재산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집요하게 했다. 가족들을 괴롭히거나 지인들을 앞세운 회유작전이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최진동 장군은 회유나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남편이 수레에 실려 나오는 일이 반복되자 젊은 부인은 남편이 고문을 당하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일제의 협박에 넘어간 최순희는 남편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만다. 

비록 남편 몰래 부인이 저지른 일이고 또 금액이 크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일은 여느 부호가 일제에 헌금한 일과는 의미가 달랐다. 지난 몇 십 년을 무장독립군을 지휘한 지도자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중요 인사가 결국에 친일로 돌아섰다고 선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오랜 세월 북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목숨을 걸고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독립투사의 일생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아내의 손에 의해... 가족이 최진동 장군이 후일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경주 당고모는 어린 시절 마치 첩보작전을 펴듯이 어린 딸을 앞세우는 아버지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중국 상인을 만나러 가는 척하면서 동지들을 몰래 만나거나 군자금을 전달하는 일에 동행했고 중국 관청을 드나들 때도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어떤 때는 감시가 따라붙지 않는 어린 경주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직접 군자금을 전달한 적도 있었다. 비록 어린나이지만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잘 알아들었던 똑똑하고 야무진 딸이었다. 경주 당고모는 아버지가 자신을 신뢰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계속되는 압박과 감시 속에서 힘들게 지내던 최진동 장군이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1941년 12월 25일, 58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만다. 동지들 만나러 갔다 돌아온 얼마 후 발병했는데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악화된 것이었다고 한다. 최진동 장군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일본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을 거부하셨고 한 달쯤 앓다 결국 돌아가셨다. 경주 당고모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가 해방이 몇 년 남았다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우리나라의 해방이 4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것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고 하셨다고 한다.

최진동 장군이 사망하자 만장이가 수없이 도착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일제가 아무도 문상하러 오지 못하게 막고 가족장만 허락했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최진동 장군은 동지들도 없는 쓸쓸한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가족들에게도 늘 낭비하는 것이 없도록 엄격했고 친척이라도 무조건 지원하지 않았던 모습이 구두쇠처럼 보여 원망을 샀을 만큼 철저했던 최진동 장군이었다.

경주 당고모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일생을 검소하게 사셨던 아버지가 남기신 유품은 동복과 춘추복 각 한 벌과 코트와 턱시도 한 벌, 그리고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고 했다. 젊은 부인은 살아생전 지나치게 검소한 삶을 살았던 최진동 장군을 기리며 모본단 두 필을 사서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깔았다고 한다. 사방에서 호위하며 감시하는 일본군의 행렬과 만장, 그리고 길에 깔린 모본단은 후일 일제가 최진동 장군에게 호화장례식을 해주었다고 말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장 독립운동의 기를 꺾기 위해 봉오동의 주봉 초모정자산 정상에 말뚝을 박고 산을 훼손했던 일본군은 최진동 장군의 혼백이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관 두껑을 쇠로 만들어 덮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명당터인 봉오동 선산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 봉오동 입구의 최운산 장군 소유지 밭 한 가운데 묘를 쓸 수밖에 없었다. 땅이 모두 얼어붙은 한 겨울이었다. 삽이 들어가지 않아 불을 피우고 땅을 녹여가면서 구덩이를 파서 매장을 했다.

그러나 일생 고락을 함께 나눈 동지요 피붙이인 형님을 쇠로 된 관 뚜껑을 씌운 채 보낼 수 없었던 최운산 장군은 그날 밤 조카인 국량과 함께 몰래 묘를 다시 파고 관 뚜껑을 나무로 다시 바꿔 덮었다. 아무도 몰래 한밤중에 형님의 묘를 다시 팠던 최운산 장군과 아들 국량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힌다.

그런 어려운 시기를 모두 보내고 우리나라가 독립을 한 후 최진동 장군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셨고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봉오동에 있던 최진동 장군의 유해는 2006년 한국의 국립현충원으로 이전되어 대전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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