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난이 일어나자 효자 정사제는 상중인데도 나라를 위해 일어섰으니 충효의 본이 될 분이다.

충과 효를 다한 정사제<鄭思悌> 의병장

오봉 정사재 의병장은 진주 정씨로 문정공<文正公> 이오<以吾> 선생의 8대 손인 진사 정성의 아들이다. 명종 때인 1558년에 태어났으며 마천리 마동, 마서의 정씨들의 조상이다.

공은 생김새가 뛰어났고, 남다른 기량을 가졌으며, 글재주 또한 남달랐는데, 더구나 당대에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 인재였다.

이러한 능력은 공이 30세 때에 생원, 진사 두 시험에 다 급제를 하였으며, 36세가 되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신유년에 문과에 등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초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어머니 상을 치르는 중에 임진란이 일어났다.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지극한 효자인 그는 지극한 효성과 불타는 충성심에서 잠시 망설였으나, 효를 잠시 미뤄두고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박죽천 선생의 의병으로 일어나라는 격문에 호응하여서 임계영 장군의 휘하에 문위세, 박효근, 소상진 등과 같이 따라 나서서 의병전에 참전하였다.

▲ 의병들의 항쟁<구글이미지>

공은 이미 과거에 등과 하였으니 순탄한 벼슬길이 보장이 되어 있었지만, 남달리 지극한 효성으로 시묘거상 중(어머니 묘소 옆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살면서 어머니 3년 상을 모시는 일을 하던 중)에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의병으로 나선 그의 의병 정신은 높은 충성심과 용맹이 더욱 빛나고 남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한 그의 충효를 함께한 정신이 더욱 빛났는지, 아니면 그의 정신이 하늘에 미친 것이었는지, 가는 곳마다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이를 본 모든 병사들은 그의 남다른 충과 효를 함께하는 용맹이 이룬 공적이라 부러워 할 정도 이었다.

공은 특히 개령, 성주전투에서 다른 군사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서 남다른 공을 세웠으나, 참전 3년 째인 남원 전투에서 끝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말았다.

▲ 정사제선생의 문집<구글이미지>

그는 운명 직전에 한 수의 시를 남겼는데.

 

[慷慨風塵倡義出 - 도적의 난리에 비분<悲憤>으로 일어나,

泣辭邱壟卽戈矛 - 울면서 무덤에 하직하고 창과 칼을 들었는데,

未了人間忠孝願 - 사람 되어 하고자 한, 충과 효를 다하지 못한 채,

九原歸路恨悠悠 - 이제 죽음 길에 이르니 한만 서린다.

이 시에 담긴 내용을 보면 공의 사상과 철학이 속속히 담긴 인간적인 면을 모두 담은 외침이라고 하겠다.

공이 이렇게 충성스런 죽음을 기리는 일은 대대로 이어져서, 영조 임금님은 갑술년에 홍문관 수찬의 벼슬을 내리셨고, 순조임금은 정해년에 정문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으며, 고종은 무진년에 도승지 홍문관 대제학을 내리셨다가 다시 갑신년에는 이조참판을 추가로 또 내리셨다.

이렇게 나라에서 공의 공적을 높이 칭송하고 벼슬을 높여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고 있던 중인데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을 당하자 예의만 찾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이런 일을 핑계로 자기 한 몸의 안전과 편안함을 꾀하지 않으신 점을 높이 산 것이었다. 공은 나라를 위해 분을 참지 못하여 일어서셔서 충의 정신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보다도 나라를 위한 큰 효의 길을 걸으신 때문이었다. 이는 국가의 존망<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개인의 어머니에 대한 효보다 더 위에 있다는 투철한 국가관을 보이신 것이며, 바른 윤리실천의 모범이 되는 것으로 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후세에 훌륭한 교훈이 되는 것이다.

* 참고 자료: 全南道史, 山陽三綱傳,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

* 글 출처 : 전자책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저자 김선태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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