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칼럼] 기울어진 '자본주의 운동장'에서 달리기

어느 청년실업자의 외침 김진희 주주통신원l승인2017.06.27l수정2017.06.2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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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pixabay.com

영화 '트루먼쇼'에서 주인공 트루먼은 3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잘 짜여진 각본의 가상 세계'였음을 자각하게 된다. 한편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주인공 네오 역시 어느 날 자신이 AI(인공지능)들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완전한 가상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두 영화는 모두 진짜가 아닌 가짜의 세상을 전제로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트루먼쇼에서의 가상현실은 물리적인 가상현실이라는 것, 즉 트루먼의 삶의 기반은 완전한 세트 무대였고, 그 무대를 사실로 위장하기 위해 배우들이 동원되었으며 전 세계 사람들은 이를 보고 즐기면서 동조한 구경꾼들이었다. 트루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상의 세트장에서 보고 기억한 가치체계를 토대로 성장했으므로 그 현실이 가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을 가상현실에 가두어 둔 채 묵인하고 그 사실을 즐기는 것이 가능했다. 반면, '매트릭스'에서는 선택적 일부가 아닌 모든 인류가 진화된 AI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완전한 가상의 세계에서 조종당하면서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어느 날 트루먼은 자신이 세트장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뇌로 인지하게 된다(물론 30년이나 지나서야). 반면 매트릭스에서의 사람들은 뇌 자체가 가상현실을 현실로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상태였으므로 프로그램이 오작동하면서 인간의 뇌가 일시적으로나마 되살아나지 않는 한 그대로 현실로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많은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들은 특정 이익을 위한 집단들이 그들만이 독점한 정보(진화하는 AI 및 과학기술 전반에 대해)를 토대로 사실을 조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조작된 사실이나 현실을 믿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역사의 흔적을 보아도 인류가 아무리 냉철하고 이성적 삶의 지표(철학적 가치 등)를 열망해 왔더라도 결국 그 역사를 지배해온 것은 현실적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도전해 왔던 인간 그룹이었고 그들에 의해 세상은 변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우연히 주어진 환경적 기회를 통한 변화도 있었지만, 이 우연한 기회 역시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이동하고 이용하려는 적극적 인간에 포착되어 변화로 이끌렸을 것이다. 그렇게 거듭된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인간 사회가 지나친 세속화로 해체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의 내면을 관통하는 가치인 철학적 체계 등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지대 역할을 해 온 덕분이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고도의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그런 역할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굳이 기술혁명 사회의 가상현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현실에서 문득문득 보편적 가치와 상식에 기반했다고 믿었던 역사적 사건들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세상에 그 진실이 드러나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때로는 그 진실 여부를 가려낼 수 없는 상태 그대로 종종 음모론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시간과 함께 묻혀버리기도 했었다.

가상현실에 대한 영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와 같은 분명한 가상세계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의도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도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과 실재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 또한 가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트릭스, 그게 뭔지 알고 싶나?

사방에 있지. 진실을 못 보도록 사방을 가리는 세상이지

                     - 영화 매트릭스에서 -

절대적인 삶의 기반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실은 대중이 알 수 없는 복잡한 원리 속에 자본과 권력의 절대적인 힘을 기반으로 그들만의 이익을 향해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왔던 것처럼 말이다.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인간의 보편적 복지 수준이 무너진 채 많은 사람들이 생존에 위협을 느끼게 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체제에 대한 의심이 대중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자본에 대한 비판서가 줄을 잇는 것을 보면, 인간의 삶이 현 체제 하에서 견딜 수 있는 마지노선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의 안정된 사회에서도, 지금의 양극화 사회에서도 자본주의는 변함없이 계속 작동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맞이하기 이전에 이미 자본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았으며 생존하기 버거운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본주의 자체를 의심해보게 된 것일까. 물론 절대적 가치 체계로만 인식하던 그 자본주의를 지금이라도 실상을 의심해야 하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일단 긍정적 신호이기는 하다. 아직은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인간의 뇌구조 자체까지 점령당한 상태가 아닌 시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지구 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으로,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원인인 '임금(노동의 대가)과 자본'의 관계, 이는 이제부터 하나씩 풀어가야할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영화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찌 됐든 우리가 마주한 지금의 경제 상황은 ‘노력하는 만큼 보상된다.’고 믿어왔던 사회적 가치가 허상이었음을 처절히 깨닫게 했고, 특정 이익집단의 무한한 욕망으로 주도되어온 우리의 실상이 이들 영화 속 세상과 일면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인간은 오랜 기간 자연에서 노동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자를 얻어 왔다.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이 생산해내고 있는 생산물의 총량은 실로 놀라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식량만 해도 전 인류가 먹을 소비량의 2배 이상을 생산해내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10억 가까운 인구가 기아로 굶거나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이런 현상을 우리는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이 설명되려면 역시 우리 삶의 기반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을 빼놓을 수는 없는 듯하다.

자연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노동으로 삶을 영위했던 상황이 드넓은 초원으로 그려진다면, 오늘날 인간 사회는 태산같이 높은 거대한 산 아래 눈에 띄지도 않은 수많은 풀들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태산과도 같은 거대한 생산능력을 갖추었고 실제 그만큼 생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다. 도대체 그 많은 생산물은 어디로 간 것이며, 여가까지 희생해가며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해온 그 노동의 결과물들은 누가 가져간 것일까.

01 우리의 삶이 고단해진 것이 과연 '저성장 구조' 때문일까

오늘날 세계경제가 푸념처럼 내뱉는 단어가 있다. 바로 '저성장 구조'라는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원인으로, 또는 왜곡된 경제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는 단어이다. 과연 이 문제들의 원인이 '저성장 구조' 때문일까. 인류가 생산해내는 생산물(생산능력)은 이미 해마다 전체 인구를 먹이고 남을 정도로 풍족한 수준에 이른 지 오래되었다. 설령 현재 수준에서 성장이 멈춘다 해도(성장률이 '0'이라는 말이지 경제규모가 줄어드는 것이 아님) 현 상황에서 당연히 결핍을 느끼고 어렵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현재 이미 자본이 보유하고 있는 무식할 정도로 엄청난 축적 재산이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즉, 이러한 생산능력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결핍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생산량 중 많은 부분들이 자본을 위한 '부'의 축적으로 끊임없이 새나가고 있음을 쉽게 추측해낼 수 있다. 자본의 지속적인 부의 축적 환경을 위해서는 저성장 구조에서조차 경제의 외적 성장(명목적 성장)이라도 이끌어내야 하며, 노동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외적 성장의 환경에서 더 많은 몫이 아닌 현재 주어진 작은 몫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세찬 강도의 노동으로 보답해야만 한다.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자본론’에서 이를 '잉여 노동(잉여 생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자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순수한 개념의 잉여 노동의 몫만을 가져갔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부분까지 착취해가는 구조였으므로 대다수 사람들이 결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현실은 이미 예정된 구조였던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정해진 그들만의 몫 중에서 누가 조금이라도 더 가져갈 것인가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드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다. 실제 인간 사회에서의 이러한 경쟁구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스템 하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조금이라도 더 많은 몫을 쟁취하여 행복해지려는 꿈을 꾸고 있고, 만족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더욱 가혹한 채찍도 마다하지 않는다.

출처 : 한국경제 2013-10-18

02 우리는 자신에 대한 무의미한 채찍을 멈추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될까

자본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증식'이라고 말한다. 자본은 '물먹는 하마'처럼 끝없이 '부'를 빨아들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성장한 자본의 크기는 우리의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으며, 그 수치조차 우리의 상식으로는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자본이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 그 축적되는 크기만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처럼(잔인한 표현이지만 현실임) 자본은 사람들 목숨을 재물 삼아 공룡화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최고의 가치인양 구호처럼 외치고 있는 ‘효용의 극대화’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들은 당연히 이 사회에서 순환되어야 할 인간이 생산한 물자의 많은 부분을 유통시키지 않은 채 활용하지 않고 쌓아두는(화폐의 형태로)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나타나며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자본에 대한 연구는 ‘상품의 가치 크기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고 있다. 상품이란 ‘투하된 인간 노동의 양적 의미’이며, 가치로서의 모든 상품은 그저 일정한 양의 응결된 노동시간일 뿐이고 그러한 상품은 우선 외적 대상으로 그 속성을 통해 인간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적 존재라고 말한다.

그들이 축적해가는 ‘부’의 크기가 커질수록 나머지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상대적 파이는 갈수록 작아지고 있는데(자본이 흡수해 버린 만큼) 우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끊임없는 경쟁에 자기반성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가혹해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들 각자 스스로에 대한 자기 채찍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무한 경쟁으로 내몰기 전에 이 왜곡된 구조를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출처 : pixabay.com

03 자본주의 경제기반인 거래(교역)는 항상 공정한 것인가

자본주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본구조인 '상품의 거래, 교역'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품의 거래라 하면 일반적으로 등가(같은 가치끼리)의 교환을 의미한다. 인류가 물물교환을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누구도 교환되는 상대 상품의 가치가 자신이 가진 상품의 가치(효용성)보다 작을 경우 쉽게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상품 교환이 이루어지는 양 당사자간 결정은 어느 정도 동일한 가치라고 인정되는 지점에서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물물교환 시대의 토대는 고스란히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토대로 이전되었다.

물론 지금의 교환 과정에는 상품의 원가에 이윤이라는 복잡한 개념이 들어와 자본가의 수고(?)의 몫으로 인정하고 있다(마르크스는 이 이윤 개념의 오류를 지적하고 잉여 노동(노동착취율) 개념으로 정리함). 문제는 이 복잡한 '이윤'과 '이윤율'을 너무도 당연시 받아들이다 보니 '이윤'의 본질이 무엇이며 '이윤율'은 어떻게 결정되는지조차도 마치 하늘의 영역인 듯 관심도, 의심도 갖지 않은 채 수용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노동이라는 상품은 어떠한가. 노동도 자본시장에서 교환되는 독특한 상품의 하나로 거래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등가 원칙이 지배하는 경제 사회에서 자본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공룡화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떤 부분에선가 부등가 거래(자본에 유리한)가 이루어졌으니 자본 축적이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자본의 생산과정에 동원되고 있는 생산 수단을 들여다보면, 물적 시설(고정 자본-이 부분에서 새로운 가치는 발생하지 않음)과 생산 활동에 투입하기 위해 자본이 구매한 노동력으로 구분이 된다. 이 두 부분 중 자본의 자기 증식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단 물적 시설인 고정 자본에서 자기증식이 발생할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노동력인데 이 노동력이 제공되는 과정에 비밀이 있는 것일까.

04 부등가 교환(노동력과 임금의)이 결정되는 ‘임금의 비밀’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이 노동력과 그에 대한 화폐(임금)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상호 거래를 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에서 거래된 것은 노동력(필요노동, 노동력의 가치)이지만, 거래된 이후 자본이 사용하는 것은 '살아있는 노동(실제 실현할 가치)'이라고 말한다. 즉 자본은 노동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거래된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노동자로부터 이끌어내어 사용하게 되는데 자본의 자기증식 부분(그들이 이윤이라고 말하는)이 여기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의 '하루 가치'는 노동자의 생존기간에 근거하여 계산되고 생존기간은 다시 일정한 길이의 '노동일'로 환산된다. 이 노동력의 하루가치가 하루노동의 가치로 표현되며 이를 필요노동(매일 동일한 건강상태를 유지하며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말한다.(자본 1-2)

그러나 자본은 처음 노동자를 고용하여 지불하기로 약속한 임금액(필요노동분) 이상의 노동을 연장근로, 노동 강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실현해낸다. 이처럼 숨겨진 임금의 가치가 노예노동에서는 자신의 생활수단 가치를 보전하는 부분(필요노동)까지 주인을 위한 노동처럼 나타나는데(노예 소유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임), 이는 소유관계(노예 소유자)가 노예 자신을 위한 노동(생존을 위한 필요노동)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반면 임금노동의 경우 거꾸로 잉여노동 또는 불불노동(임금으로 계산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지불노동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화폐관계가 임금노동자의 무상노동을 은폐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자본 1-2).

05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은 노동력을 통한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다

이 부분(거래된 가치 이상 사용되는 노동력)에 자본의 잉여가치 생산이 숨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본 증식의 비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숨어 있는 잉여가치는 노동 강도, 노동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갈수록 커질 수가 있다. 즉, 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 증가는 물론 끊임없는 경쟁체제를 가동함으로써 잉여가치 부분은 갈수록 늘고 있다. 인류는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생산성 극대화의 풍요로운 환경 속에 살고 있음에도 오히려 더욱 생존에 급급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 잉여가치(자본의 몫)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그 흐름이 멈추는 순간 죽음을 맞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그 흐름이라는 말은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끝없는 유통 과정을 의미하며 자본이 생산 라인을 가동해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싸이클이라 할 수 있다. 자본축적의 원인(잉여가치)이 발생되는 순간이며 이러한 생산물 거래가 중단되는 순간(즉 자본의 속성인 자기증식이 멈추는 순간) 자본도 멈추게 되는(죽음)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화폐(자본)의 유통과정이 멈추거나 둔화되는 순간 자본의 증식 속도 역시 멈추거나 떨어지게 되는데, 자본이 멈춘다는 것은 더 이상 자본으로서의 의미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경기 침체기에 지속적인 양적 완화를 통해 실속 없는 외형적 성장이라도 지속하려는 것이며, 이 외형적 성장 과정에서조차 자본은 노동과의 분배율 구조를 더욱 왜곡시키면서 양극화를 더욱 촉진시켜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통 과정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 유통을 위한 생산과정에서 자본이 투하한 자본(기계 등 생산시설에 대한 <고정자본>과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한 <임금>) 이상의 생산물 총액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자본 증식) 자본이 노동에 지불한 대가(임금) 이상의 과잉 노동이 사용되어야 하고 자본은 이 과잉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면서 더 큰 자본으로 성장하게 된다. 즉 그 잉여가치 생산에 투여된 과잉노동의 크기는 갈수록 증가하면서 전체적인 부의 분배는 그 크기만큼 더욱 왜곡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곳이 이 부분이며, 개인들이 피나는 무한경쟁에도 쉽게 그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한 채 개인의 자기책임에 의한 경쟁만으로는 개인이나 세상이 달라질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래서 장하성 교수도 '오늘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힘든 것이 그들 때문이 아니며, 오늘의 사회 구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러한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는 원인에 대해 '분노하라'고 했던 것이다.

출처 : pixabay.com

06 『자본성장률(r)>경제성장률(g)』의 구조는 극복될 수 있을까

이처럼 노동 시간과 강도, 노동생산력 증대 등 수단을 동원해 잉여가치 부분을 더욱 확대하면서 함께 성장해온 자본의 성장률은 경제성장률을 능가하고 있었다. 자본의 성장률이 경제성장률을 능가하고 있다는 말은,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성장하는 부분이 대부분 자본에게 흘러들어갈 뿐 노동의 대가(임금)로 제대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경제성장 부분이 자본과 임금에 어떤 비율로 배분되는가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자본 성장률이 경제성장률을 능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들은 어제 수준의 노동으로는 오늘 더 작은 실질 소득을 가져갈 수밖에 없으며, 오늘과 똑같은 실질소득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어제보다 더 많은 노력(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그의 저서 ‘21세기자본’에서「 r> g 」로의 구조가 시장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본시장이 더 완전할수록 r이 g보다 커질 가능성(양극화의 원인)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즉 이 부등식은 과거에 축적된 부가 생산과 임금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기업가는 필연적으로 자본 소득자가 되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 대해 갈수록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고 말한다. 자본은 한 번 생성되면 생산 증가보다 더 빠르게 스스로를 재생산하게 된다며 그는 이런 구조를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상황’이라고 비유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부등식의 원인이 시장의 불안전성에 따른 것이 아니어서(순수하고 완전한 경쟁을 통해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그 반대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위험은 현실이지만 아직 진정한 대안은 없는 상태에서 이런 효과를 상쇄시킬 수 있는 공공정책, 누진적 글로벌 자본세가 필요하지만, 이런 제도나 정책들을 확립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국제 협력이 필요한 것인 만큼 실제 대응은 훨씬 미온적이고 효과가 적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불평등이나 자본주의 자체를 비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며,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은 그것이 정당화되기만 한다면(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의 내용처럼), 즉 『사회적 차별이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두는 한』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위험한 현실임에도 진정한 대안이 아직 없는 현 상황에서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으려면 민주주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현실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요원하다는 그의 우려에 더하여,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급속한 진전에 더욱 관심이 이동하고 있는 현실은 더욱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해결되지 못한 자본의 속성이 오히려 이 돌파구를 활용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튀어 더욱 왜곡된 상태로 드러나게 될지 계산이 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세계에서는 우리의 의식이 아무리 깨어있어도 영화 ‘매트릭스’의 시스템에서처럼 더욱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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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재벌 대기업에 대해 중소기업, 영세기업, 소비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불공정 운영을 해 온 공정거래위원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김상조 교수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경기에서 경기규칙과 심판이 존재하듯 경제활동에도 경제 규칙과 이를 집행하는 기관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공정거래제도이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를 집행하는 기관이라고 말한다. 공정위의 정상화 외에도 우리 사회는 도처에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새 정부는 공정, 정의의 실현 등 분명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공정거래제도를 비롯한 공정한 정의의 실현 등은 어디까지나 현실 법체계 하에서 이를 제대로 실현하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그 동안은 법체계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심히 불공정한 사회였다는 의미이며 이제 이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지적했듯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자본주의 경제 기반 자체의 불평등 구조는 어떻게 정상화해야 하는 것일까. 기울어진 상태에서 아무리 정의, 평등, 공정의 가치를 실현하려 해도 기울기가 가속화하는 것을 완화할 수 있을 뿐, 기울기 자체를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운동장 자체의 설계 항목들을 되짚어보는 공론화가 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 생애는 공부 잘할게요. 미안해요.”

어느 청년실업자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휴대폰 문자라고 한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원인도 모른 채 외치고 있을 이 메아리가 가슴을 울린다. 이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배려도 받지 못한 그들이 제일 처음 배운 것은 ‘자기반성’ 이었고, 그들은 그 자기반성을 시작으로 이 기울어진 세상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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