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1] 허창무 주주통신원

■ 내사산에서 가장 낮은 낙산

도성 전체 거리는 59,500척, 요즘 단위로는 약 18.6km이다. 그 긴 거리를 하루에 모두 해설할 수는 없어서 4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네 구간이란 낙산구간, 목멱산(남산)구간, 인왕산구간, 백악산(북악산)구간으로 내사산의 각 구간을 말한다. 낙산구간은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목멱산구간은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 인왕산구간은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그리고 마지막 백악산구간은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다.

낙산은 내사산 중에서 가장 낮은 산이다. 굳이 산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해발 125m이니까 좀 높은 언덕이라고 해야 맞다. 가장 높은 백악산이 342m 그 다음 높은 인왕산이 338m, 목멱산이 262m다.

내사산이란 무엇인가? 왕국에서 통치의 중심이 되는 궁궐을 법궁(法宮) 또는 정궁(正宮)이라고 한다. 궁궐을 지을 때 궁궐을 보호하는 성을 쌓는다. 내사산이란 그 성을 이어 쌓는 사방의 산이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정하는 산이 주산(主山)인데, 법궁은 주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으로 짓는다. 그러니까 주산을 먼저 정한 다음 법궁을 짓는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풍수지리설로는 주산을 북 현무(玄武)라 하고, 법궁의 남쪽 산을 남 주작(朱雀)이라하며, 동쪽에 있는 산을 좌 청룡(靑龍), 서쪽에 있는 산을 우 백호(白虎)라 한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보면, 북 현무는 백악산, 남 주작은 목멱산, 좌 청룡은 낙산, 우 백호는 인왕산이다. 이 네 산의 정상을 이어 쌓은 것이 한양도성이다.

■ 사실상 대문 구실을 했던 혜화문(惠化門)

다시 낙산구간으로 돌아가자. 그 출발점인 혜화문은 속칭 동소문으로 도성 축성 초년도인 1396년 세워졌다.

현재 북쪽으로는 옛 서울시장 공관의 높다란 성곽담장이 있고, 남쪽 경계에는 동소문로가 있다. 그것은 원래 현재 위치 바로 아래 동소문로 한가운데에 있었다. 1928년 일제강점기에 남소문이라는 광희문과 함께 문루(門樓)는 퇴락하여 없어지고, 홍예문만 남았다가 그것마저 1939년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 전찻길을 놓으면서 철거되었다. 이 문의 문루는 조선 중기에도 무너졌었는데, 영조20년(1744) 문을 보수하고 문루를 다시 세웠다. 그러니까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위치를 변경하여 복원한 모조품이다.

북대문이라는 숙정문과 동대문이라는 흥인지문 사이에 있어 옛 경원가도의 지름길에 놓였던 문이었고, 사대문 출입을 못했던 여진족의 사신이 이 문을 통하여 동대문성곽공원 앞 북평관(北平館)에 머물렀다. 숙정문이나 흥인지문으로 출입이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경원가도의 지름길인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이 편리했을 것이다.

한여름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 때를 제외하고 거의 일 년 내내 숙정문은 닫혀있었다. 음기가 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실제로 숙정문 밖 성북동 골짜기에 드넓은 뽕나무밭이 있었는데, 할 일 없는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 또는 도성 밖 불량배들이 뽕나무밭에서 일하는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풍기를 문란케 했다. 그래서 혜화문은 북대문 구실을 했다. 그 당시 사대문 수비군사는 30명이었고, 소문 수비대는 20명이었지만, 혜화문은 소문이면서도 30명의 수비군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혜화문의 원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런데 성종 때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 비),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덕종 비, 인수대비),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예종의 비) 등 선대의 과부 왕비들이 세 사람이나 나오는 바람에 원래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거처했던 수강궁을 증축해 창경궁으로 개명하고, 그 동쪽 대문을 홍화문이라고 지었다. 이렇게 되자 이름이 같은 두 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중종 때(1511) 동소문의 이름을 혜화문으로 고쳤다.

혜화문의 홍예 천정에는 봉황의 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혜화문 밖은 삼선평야였다. 드넓은 농경지에는 때도 없이 참새, 직박구리, 까치, 까마귀, 동고비 등 온갖 들새들이 몰려와 농사를 망쳤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시대, 농사를 망치면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새들의 왕이라는 봉황을 잡새들을 물리치려는 의도로 그려 넣었다. 날개가 붉은 것은 수컷인 봉이고, 날개가 푸른 것은 암컷인 황으로 그림은 암수 한 쌍을 이루고 있다. 그 지역에 지네가 많아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린 대신 봉황을 그려 넣었다는 창의문의 천정화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고 보니 일제강점기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좋은 날>의 배경이 되는 곳도 동소문 안이다. 그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 닥친 운수좋은 날이었다.” 김 첨지는 그날따라 많은 손님을 태워다주고 보통날의 몇 배의 돈벌이를 했다.

그의 예감대로 운수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 한편으로 그날 내내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 아침 아내가 했던 애소 때문이었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그의 아내는 지병 때문에 앓아누워있었다.

그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집에 들어가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퇴근시간을 늦추려고 평소에는 돈이 없어 마시지 못했던 비싼 술과 음식을 마음껏 시켜먹었다. 술에 흠뻑 취했어도 아내가 몹시 먹고 싶어 했던 설렁탕을 사라지고 들어갔다. 그러나 집안은 묘지처럼 음산하고 고요했다.

그는 섬뜩했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 못하니, 왜 먹지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아내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김 첨지는 목 놓아 울었다. 그가 벌어온 돈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서민들이 겪었던 참담한 사정을 묘사하는 수작이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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