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라문황씨는 고향이 대만이다. 유학 온 한국남성을 만나 결혼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 대만에 거주하는 김동호 주주통신원으로부터 <한겨레:온>을 소개받아 한겨레 주주가 되었다. 남편 이은모씨는 한겨레 애독자다. 라문황씨는 한국에 살면서 한지그림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지 민속그림작가가 되었다. 대만과 한국에서 수차례 전시회도 가졌다. 이번 7월 3일부터 8월 21일까지 종로에 있는 <문화공간 온>에서 한지 민속그림전시회를 연다. 아래 글은 하단의 한문 문장을 김동호 주주통신원이 한글로 번역한 글이다. 

< 아리랑 사랑 >

1985년 어머니는 당시 제가 한국남자를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반대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엄마에게 세가지를 말해주었답니다.

첫째, 한국사람들은 몹시 가난해서 김치 한가지 하고만 밥을 먹는다.

둘째, 한국사람들은 쉽게 마누라를 때린다.

셋째, 한국 시어머니는 모시기 힘들다.

어머니는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가 여지껏 살면서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이 한국남자는 다 가지고 있더구나."

제가 싫어하는 것들은, 매운 음식과 술, 개고기입니다.

오, 하느님! 저는 몹시 후회를 했습니다. 일찍 알았더라면, 저는 매일같이 염불하듯 이야기 했을텐데. '난 돈이 싫어. 돈이 싫다고' 그럼 이 남자는 돈이 무진장 많은 남자였을텐데.

그런데 이 한국남자는 저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린다고, 아버지를 모시고 맥주를 마시고, 개고기를 먹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저의 아버지는 복이 없으셨나 봅니다. 이 한국 남자의 석사학위 졸업식에 참석하신 후 3일만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까요.

제가 가장 싫어했던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이 한국남자, 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라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지요.

1989년 8월 26일 우리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오늘부터 이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이 사람'이 내가 의지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또 제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이토록 멀리 시집을 간다면, 너의 눈물이 옆으로 흐르게 될거야."

'눈물이 옆으로 흐른다'는 말은 이불 속에서 몰래 운다는 말입니다. 눈물이 옆으로 흘러 베개를 적신다는 뜻이지요. 결혼식이 끝나고, 가족들을 떠나보낸 그날 밤, 엄마 말처럼 저는 배게를 적시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일어나 남편이 출근을 하자, 저는 그만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길가의 간판도 <中華料理„중화요리> 네글자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삼성물산에 출근을 했는데, 일찍 출근하고 늦게 돌아왔습니다. 저는 어린아이가 되어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저녁 벨소리가 들리면 뛰어나가 문을 열어줬지요.

이 때서야 저는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남편을 하루만 못봐도 삼년을 이별한 듯 느껴지더군요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모두 제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생각날 때 바로 전화를 하라고. 하지만 국제전화요금이 몹시 비싸서 감히 걸지를 못했습니다.

시동생은 제가 전화를 친정에 걸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정말 고맙게도 3,000원 짜리 전화 카드를 자주 사주었습니다. 그러곤 저와 함께 빨간 공중 전화 부스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저를 밀어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전화 카드를 꼽고는 문을 닫아주었습니다. 제가 조용히 마음껏 엄마와 통화를 하라고...

전화 벨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리고, 엄마가 받으면 저는 그저 한마디

'엄마'

저의 목은 이미 메어,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도 제 목소리를 듣고, 그저 제 이름만 불렀습니다.

'원황'

그리고는 역시 아무말도 잇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렇게, 저와 엄마는 '다,다,다......' 소리만 듣다가, 3,000원 요금이 거의 끝날 때 나는 '뚜' 소리를 듣고서야 황급히 말했습니다:

'엄마, 안녕!"

엄마도 간신히 한 말씀 하셨습니다.

'원황, 몸 건강해!'

이렇게 몹시도 비싼 3,000원 짜리 전화카드로 우리는 네마디 말만 했습니다.

저는 "엄마~~~엄마, 안녕!"

엄마는 "원황(문황의 중국어 발음), 몸 건강해."

(다음 편에 계속)

<愛上阿里郎>


1985年當我的母親知道我和韓國男人交往時,她極力反對。理由是有人告诉她~
(1)韩國人很窮,吃飯只配泡菜。
(2)韩國人很會打老婆。
(3)韩國婆婆很難侍候。
媽媽還說:妳生活中最討厭的三件事,這韓國男人都擁有。
天啊!我很後悔,早知道,我就天天說:我讨厭錢,我討厭錢。
(那麽這男人就是最有錢的人了)。

我討厭
(1)辣的食物
(2)喝酒。
(3)吃狗肉。
但當這韓國男人和爸爸在一起時,他總是能讓爸爸開心,因爲他會陪爸爸喝啤酒,吃狗肉。可惜爸爸没有福氣,在参加完這韓國男人的硕士畢業典禮第三天,車禍去逝了。

我最討厭的事都在這韓國男人身上,但是我還是愛他。我决定跟他回到首爾去。

1989年8月26日我們在首爾舉行婚禮時,我才突然醒悟到,啊!今後在這大韓民國的土地上<他>是我唯一的依靠。

媽媽曾說:妳若堅持要嫁這麽遠,妳的眼淚會横着流。
婚禮结束,送走家人的那天晚上,我的眼淚横着流了(這意思是只能躲在棉被里哭,眼淚横着流在枕頭上。)

隔天起床,送丈夫去上班後,我成爲聾啞人了。我聽不懂公公婆婆說的話,馬路上廣告看板,只有<中華料理>四个字我看懂。

丈夫在三星物產上班,早出晚歸,我如婴儿般,等待着,等待着,等待他下班,門铃聲響時,我雀跃的跳起来開門。
此時我终于明白了<一日不见如隔三秋>這句話了。

公公,婆婆,丈夫都說想媽媽就打電話。但國際電話很贵,我不敢打。
小叔(丈夫的弟弟)看我不敢在家打電話,很貼心的常常買一张3000韓元的電話卡,然後拉着我去红色的公共電話亭,打開門,把我推進去,塞给我一张電話卡,再帮我關上門,讓我安静的打電話给媽媽。
當電話聲響傳來媽媽的聲音時,我叫了一聲<媽>,我的喉頭哽咽住了,我無法說出話來。
媽媽聽到我的聲音也只叫了我的名字<文凰>,也哽咽着說不出話來。
就這樣,
我和媽媽聽着<答,答,答…………>聲,3000韓元很快就没了,<嘟>聲出来表示錢快没了。
我趕快說:媽再见!
媽說:妳保重。
就這樣很贵的3000韓元電話卡,我們只說了四个字
我說:
媽…………媽再见!
媽媽說:
文凰………妳保重。
(待續)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라문황 주주통신원  low030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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