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2] 허창무 주주통신원

■ 조선조 500년 동안 이어진 축성 및 개보수

○ 태조 때의 축성

혜화문을 뒤로 하고 동소문로를 건너서 삼선동 성곽길로 들어선다.

가톨릭대학교 담장이 된 성곽길을 따라가는 기분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성곽은 이제 그곳의 확고한 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유재산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길이 장장 500m나 계속된다. 그러나 그곳의 성곽 보존생태는 그런대로 볼만하다. 검정색 나무계단을 올라 평지에서 해설은 계속된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59,500척의 전 구간을 전국 97개 군현에서 차출된 인원이 군현별로 약 600척씩 나누어 쌓았다. 각 담당구간은 북악산 정상에서 천자문의 천(天)자로 시작해서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지나 다시 백악산으로 와서 97번째 조(弔)자로 끝난다.

기간은 태조 5년(1396) 음력 1월9일부터 2월28까지 49일 간, 또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49일 간, 2회에 걸쳐 197,400명을 차출하여 쌓았다. 농번기와 혹서기 혹한기는 피하고, 농한기에만 일했을 것이니 아마도 일 년에 기껏 3개월 남짓 공사에 동원되었다. 남정네가 부역에 동원된 기간에는 모름지기 아녀자들이 농사일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축성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없었다. 게다가 산에는 도로도 없고 운반구도 변변치 않아서 멀리서 성 쌓을 돌을 가져올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석이 흔한 백악산 목멱산 인왕산 등은 그 산에서 수집한 돌로 성곽을 쌓았다. 그러나 낙산구간은 낮은 산으로 자연석이 많지 않아 대부분 토성으로 쌓았다. 2천 년 전에 쌓은 몽촌토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토성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쌓으면 석성보다 더 견고한 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태조 때 급하게 쌓은 토성은 홍수에 씻기고 허물어져 심하게 훼손되었다.

○ 세종 때의 개축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 3년(1421) 스스로 한양수축도감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성곽 보수공사를 지휘 감독했다. 그는 궂은일은 자기가 도맡아할 테니 왕은 선정만 베풀라고 아들인 세종에게 당부하고, 악역은 그가 도맡아 처리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조선 건국초기 왕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세종 4년(1422) 1월15일부터 시작하여 2월23일에 끝난 수축공사에는 약 32만여 명이 동원되어 도성의 전 구간을 석성으로 바꾸었다. 이때 청계천 수문도 3칸에서 2칸을 더 늘려 오간수문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한 공사로 사망자는 872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 농본국이었던 시대, 축성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말썽 많은 4대강사업보다 더 힘든 사업이었을 것이다. 무거운 돌을 운반할 장비도 없었고, 그 많은 성돌을 다듬을 연모도 없었다. 그러므로 태조 때는 자연석을 주워 모아 밑바탕 초석으로는 비교적 큰 화강암을 놓았지만, 위로는 무질서하게 쌓았다. 그저 돌 위에 돌을 되는대로 얹어놓았다고 하는 편이 적절한 표현이다. 또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울기를 완만하게 쌓았다.

그러다보니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훼손된 부분이 많아졌다. 그래서 세종 때의 축성은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길쭉한 장대석을 초석으로 깔고, 위로 갈수록 작은 자연석을 아귀 맞추어 정연하게 쌓아올렸다. 성돌도 전반적으로 태조 때보다 더 커졌고, 직사각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용했다.

○ 숙종과 순조 때의 축성

마지막 대대적인 개축을 했던 숙종 때(1704년, 숙종 30년 수축 시작)는 태조 때나 세종 때와는 달리 오군영의 군인들이 일정구간을 나누어 도성의 보수공사를 담당했다. 오군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과 경기 일원 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을 말한다. 이러한 관행은 그 후로도 이어져 영조 때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이 도성수축을 분담했다. 숙종 때는 개선된 장비와 석공기술의 발달로 요즘의 축성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정교한 모양을 보여준다. 한 변이 40~45cm내외의 사각형 성돌로 빈틈없이 짜 맞추듯 성돌을 쌓았다.

 

이때의 축성기법은 그 후 순조 때의 개축 등 조선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세종 때는 태조 때 급조한 성곽이 여러 군데 훼손되어 보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숙종 때는 다듬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방형의 돌을 쌓아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어떻게 추진할 수 있었을까? 장희빈과 인현왕후 등 궁중 여인들의 치마폭에 휘둘려 정사를 소홀히 한 왕으로 알고 있는 숙종은 실로 단호한 카리스마를 가진 명철한 왕이었다. 숙종 때 나라의 경제사정은 한결 나아져서 조선 중후반기의 중흥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광해군 때 시작된 대동법이 이때 완전히 시행되어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전환되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상평통보라는 화폐경제가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영정조시대의 본격적인 중흥기로 이어지는 토대가 구축되었다. 말하자면 숙종 때는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이 있었기에 도성수축이 가능한 일이었다.

순조 때는 견고한 성곽 수축을 위하여 성돌의 크기가 숙종 때보다 더 커졌다. 가로 세로 60cm 정도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성곽을 쌓았다. 돌의 크기에 따라 공력 또한 배가 되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큰 돌을 사용했을까? 그 때 이미 세계열강에서 성능이 우수한 신무기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포의 파괴력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굳건한 성을 쌓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제 구실을 하지 못한 한양도성의 방어시설

한양도성은 이렇게 수차례 수축을 거듭했지만, 방어시설로는 제 구실을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침 때는 물론 내란 때에도 도성을 지키지 못했다. 난이 일어날 때마다 왕과 지배층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뒤에 남아 고초를 당하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이유는 이러하다. 도성 안에는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량미를 조달할 농토가 없고, 무기를 자체적으로 조달할 시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는 “애써 성을 쌓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불평을 했다.

그러나 영조는 1751년(영조 27년) 9월11일, 왕은 “도성을 지키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먼저 성 위에 올라 백성과 함께 싸우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수성윤음이다. 그와 더불어 도성민들에게 각각 담당 구역을 정해주고 유사시에 무기를 들고 맡은 구역을 지키게 했다. 도성민을 주체로 하는 도성방위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왜 평소에 군량미를 비축하고, 무기를 생산할 시설을 확보하지 않겠는가.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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