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나기는 쉬워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학문이 몸에 배어 이루어진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美質之稟於天者易得 而學問之得於己者難矣

미질지품어천자이득 이학문지득어기자난의

- 권근(權近, 1352~1409),『양촌집(陽村集)』 권15

「이반(李蟠) 군에게 주는 서문[贈李生蟠序]

 

양촌 권근이 채 20살도 되지 않은 나이로 막 과거에 급제했을 때, 양촌의 할아버지 성재(誠齋) 권고(權皐) 선생이 양촌에게 들려준 말씀입니다.

“네 증조할아버지인 문정공(文正公 권보(權溥))은 충렬왕 때 과거시험을 주관하셨던 분이다. 이때에 익재공(益齋公 이제현(李齊賢))도 과거를 보아 너처럼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단다. 문정공은 학문에 힘쓰는 익재공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사위를 삼기까지 하셨지. 익재공은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학문에 힘써 어떤 사람이 어느 책에 정통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 배웠고, 누구에게 좋은 책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그 책을 빌려다 밤을 낮 삼아 날마다 부지런히 읽곤 했단다. 어느 날 집에 문정공의 손님이 찾아왔단다. 마침 옆방에서 익재공이 책을 읽고 있었지. 그런데 책 읽는 소리가 좀 컸는지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구나. 하여 문정공이 책을 그만 읽으라고 했다지. 그런데도 익재공은 목소리를 낮추고 계속 읽었단다. 이와 같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나라의 큰 인재가 되었듯이, -중략- 너도 과거 급제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익재공을 본받아 부지런히 노력하도록 하여라.”

 

▲ 양촌 권근 응제시주 (출처:다음백과)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주관한 과거에 급제한 익재공이 부지런히 공부해서 나라의 큰 인재가 되었듯이, 너도 자만하지 말고 익재공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큰 인재가 되라는 축원을 젊은 손자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큰 인재가 된 양촌에게 이번에는 웬 스님이 세 번씩이나 찾아와 자질이 훌륭하고 공부까지 열심히 하는 한 젊은이의 앞날에 보탬이 될 만한 글을 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 젊은이는 다름 아닌 익재 이제현의 손자 이반(李蟠)이었습니다.

양촌은 이반에게 옛날 할아버지께 들었던 익재공의 일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이어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학문이 몸에 배어 이루어진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하고 마지막으로 부탁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자네 할아버지를 모범 삼아 학문에 힘쓰게나. 그리하면 도덕(道德)이든 공업(功業)이든 배운 것을 훗날 조정에 나가 마음껏 펼칠 수 있고 할아버지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걸세.”

얼핏 보면 양촌 선생의 말씀은 ‘타고난 것보다 공부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상식적인 교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훈이 아니라 이분들의 관계입니다. 양촌 증조할아버지의 사위가 익재이니, 익재의 손자인 이반은 양촌과 사돈 사이입니다. 양촌이 젊은 시절 할아버지께 얘기를 듣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익재 같은 대학자로 성장하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익재의 손자에게 다시 그때 얘기를 전해주게 되었으니 양촌으로서는 옛일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했을 것입니다. 이반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생생한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으니 남다른 감동이 일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증조할아버지 얘기를, 증조할아버지 사위의 손자에게 다시 전해 주는, 아름다운 이어짐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지 않은가요?

자녀교육은 가정교육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린아이는 집안 어른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가정교육은 현재 집에서 함께 사는 가족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뵐 수 없게 된 선조(先祖)들의 일화를 자손들이 전해 들을 수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가정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집안 어른이나 가까운 지인들을 통해 모범이 되는 선조들 이야기로 가정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즘에는 소가족화 되면서 가족의 범위가 좁아져버린 탓에 옛 교육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날 복잡하게 꼬여버린 교육 문제의 원인 중에 이런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편집자 주] 한국고전번역원 이규옥 수석연구위원은 한겨레 창간주주다. 정의로운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간 주주가 되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으로 된 기록물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한다. 중학교 시절 한학자이신 할아버지의 제자 선생님께 <명심보감>을 배웠다. 한문이 재밌고 잘 맞는 공부란 걸 알게 되었다. 역사에 관심이 커 사학을 전공한 후 한문과 역사, 둘을 아우르는 곳,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규옥 창간주주는 주로 조선시대 문집에 실린 글에서 소재를 뽑아 대중이 읽기 쉽게 바꾸어 <이규옥의 '고전산책'>을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이규옥 주주통신원  galji43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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