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대륙의 중심지 우루무치

이번 여행을 가지 않았으면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두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시아대륙의 중앙이 우루무치이고, 우루무치는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도시라는 사실. 가장 가까운 바다가 인도양으로 3,100Km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대만 카오슝에서 직항이 없어 3시간 비행을 해서 우한(武漢,무한)에서 일박을 하고 다시 5시간 가까이 북으로 이동하여 우루무치 공항에 내렸습니다. ‘우루무치‘란 몽고어로 ’아름다운 목장‘의 의미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청나라 때 신강성이 설치되면서 성도가 되었다가, 1955년 신장(新疆,신강)위구르자치구가 되면서 우루무치란 이름의 도시로 구도가 되었습니다. 오랜 교역의 통로였던 실크 로드의 천산북로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오아시스이기도 했고요.

당나라 초기 부처님 당시 원문으로 불교공부를 하고자 천축으로 떠났던 현장법사가 돌아와서 쓴 ‘대당서역기‘로 알려진 바로 그 서역 일부이기도 하지요.

현장의 뒤를 이어 100여년 후 신라의 승려 혜초가 해로로 인도에 들어갔다가 육로로 돌아오며 거쳐 간 지역이기도 합니다. 혜초가 지은 ’왕오천축국전‘이 우루무치의 동쪽에 있는 둔황(敦煌,돈황)에서 발견되어 현재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보관이 되었고, 둔황을 거쳐 장안으로 갔던 그의 견문록은 세계 4대 여행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 사진1 혜초는 현장의 뒤를 이어 오대산에 머물며 불경의 한역에 일생을 바칩니다. 2016년 중국 불교 4대 성지 오대산에서

참, 현장법사라고 하면 조금 아리송하신가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거느리고 천축에서 불경을 구해온 삼장법사가 바로 서유기의 모티브를 제공한 현장이지요. 삼장이란 경장(불교의 경전), 율장(불교의 율법). 논장(경전 및 율법의 주석과 해석)에 모두 능통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로 현장법사가 불교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합니다. 현장법사 이전의 번역을 구역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의 번역을 신역이라 합니다. 현장법사를 통해서 제대로 된 불교가 전파가 되지요.

▲ 사진2 비행기에서 찍은 우루무치 시가. 남쪽에는 톈산산맥의 보거다봉(5445m)과 왼쪽에는 염호(소금 호수, 마치 미국 유타 주의 솔트 레이크)가 있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해발 800m의 건조한 도시

우루무치는 신장자치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며, 현재 4개의 지하철 노선이 건설되고 있는 활기찬 도시입니다. 앞으로 소개를 하겠지만 중국의 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황폐하고 가혹한 기후의 넓은 땅 ‘신장’이라고 하네요.

신장박물관에는 다양한 종족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 사진3 입구에 있는 이 밀랍인형이 얼마나 정교한 지, 우리 일행 중에서도 오른쪽 사진사를 실제 사람으로 착각하고 더구나 우기기까지
▲ 사진4
▲ 사진5
▲ 사진6

숱한 전쟁과 여러 민족의 이동으로 현재 신장에 거주하는 민족은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 살고 있음을 박물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앞코가 올라간 신발의 이유를 묻자 전속 어린 여자 해설사가 아마도 자갈이 많은 지역이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고 고안됐다고 설명. 좀 의심스럽지만 통과합니다.

또한 남자들이 쓰는 모자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작은 모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하기도 한데 실제로 착용하는 모자라고.

▲ 사진7  부엌과 침실 그리고 난방까지 해결하는 가장 작은 공간일 듯

2층에서는 新疆古代乾屍展覽(신강고대건시전람)을 하고 있습니다. 3,800년 전의 러우란(樓蘭,루란)여인, 3,200년 전의 하미(哈密,합밀)여인, 3,000년 전의 치에무어(且末,차말)여인의 건시(乾屍)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건시는 이집트의 미라와 다릅니다. 미라가 장기를 드러내고 방부처리를 해서 보존하였다면 건시는 사막과 같은 건조한 지역에서 빠르게 건조가 되어 온전히 보존된 형태입니다.

특히 러우란의 미녀라고 불리는 3,800년 전 여인은 1980년에 출토가 되었는데 피부색, 장기, 머리카락, 의복 등이 거의 완벽하여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출토 초기와 다르게 조금 변색이 되었다고 하네요. 육안으로 어림잡아도 작지 않아 보입니다. 40~42세의 여인으로 고동색 피부를 가진 동유럽 조상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벽처럼 수직으로 된 산이나 언덕에 횡으로 적당한 공간을 파서 그곳에 시신을 안장하였더군요. 그래서 바로 건조가 되면서 수천 년 보존이 되었습니다. 사진촬영이 허락되었지만 차마 촬영할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 사진8
▲ 사진9

‘신장고대복식회고전’에 소개된 그림(사진8, 사진9)입니다. 제가 주목한 이유는 여러 문헌에 과거 미인에 대한 기록들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풍만하지 않으면 미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당 현종을 미혹한 절세미인 양귀비가 요즘 분석에 의하면 80Kg 대 근처라고 합니다. 나이도 자기보다 더 먹은 안록산 장군을 양아들 삼고 얼렀다는 기록이 이해가 되시죠.

▲ 사진10 천산북로를 따라 유럽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우루무치, 또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국적인 도시의 상가입니다. 신장 International Grand Bazaar의 모습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 유목민족을 거쳐 흉노족이 지배를 했었는데, 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후에, 비록 중원은 통일하였지만 북쪽은 흉노족이 지배를 하고 있었고, 유방 본인도 흉노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감히 북벌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7대 무제 때 곽거병장군 등을 보내 흉노를 물리치고 신장지역을 다스리며 실크로드를 개척합니다.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알려진 이도 바로 무제이지요.

중원의 힘이 약해지면 또 다른 민족이 지배를 하지요. 흉노 이후에 돌궐족이 엄청난 위세를 떨칩니다. 돌궐은 터키어로 투르크, 튀르크의 중국어 음역입니다. 당태종 이세민도 이들의 힘을 빌려 권력을 장악하지요. 당 왕조 이후에는 위구르제국의 영역이 됩니다. 그리고 또 몽골족이 차례로 지배를 하다가 원나라를 물리친 청나라에 의해 다시 청나라 영토가 됩니다. 후에 청의 국력이 약해지자 위구르인들의 저항이 강력해지고, 청의 군대는 철수를 하기에 이릅니다. 1933년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건국되었다가 3개월 만에 망하고, 1944년 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보시면 왜 신장지역이 문제가 되는지 아시겠지요? 보통은 1대 2대까지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3대가 넘어가면 동화가 되거나 흡수가 되어 굳이 자기들 조상을 언급하지도 않지요. 중국이 쓰는 방법입니다. 여기 신장이나 티베트나, 최근에는 홍콩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100년 200년 지나면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가 되지요.

그렇지만 특히 신장, 위구르인들은 이슬람을 믿고 있기에 문제가 더 복잡합니다. 종교는 민족 이상의 갈등을 지속하며 죽음도 마다하지 않지요.

중국 전역은 북경시를 단일 표준시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시차를 2시간 인정해서 등교나, 일반 출근 시간은 보통 10시에, 퇴근은 저녁 8시에 합니다. 따라서 점심은 보통 2시에 하지요. 이곳은 북반구에 속해 저녁 10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고, 아침 6시에 기상을 해도 해가 떠서 환합니다. 반대로 겨울에는 아침 8시라고 해도 깜깜하겠지요.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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