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 순국 72주년 추도식 및 기념 사업회 1주년 기념식

김종선 주주통신원l승인2017.07.10l수정2017.07.1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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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그리고 간도지역의 독립군이 활동하고 승리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분은 최운산 장군이었지만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2017년 7월 5일 인사동 관훈클럽의 신영 연구기금 세미나실에서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와 항일 독립운동가단체 연합회가 후원하는 형식으로 최운산 장군을 기리고 연구하는 추도식과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식은 1부의 추도식과 2부의 기념 사업회 창립 1주년 기념식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1부에서는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최운산 장군의 연보 보고, 함세웅(항일 독립운동가 단체 연합회 회장)신부의 추도사가 있었다. 함신부는 추도사에서 "최운산 장군의 삶을 통하여 당시 선조들의 형용하기 어려운 고난의 삶과 희생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으며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을 내던지신 숭고한 정신은 청산리, 봉오동전투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서 현재의 우리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2부의 기념식에서는 기념사업회 활동 보고 및 기념 강연이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2016년 7월 4일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2016년 10월 8일에서 11일까지 봉오동전투 전적지를 답사하였고, 봉오동 수남촌 마을과는 역사문화 보존과 현양을 위한 협약식을 맺었으며, 연변지역의 역사학계와 간담회를 개최하여 만주지역의 항일투쟁 역사사료 발굴 및 연구방법 등에 대하여 함께 연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봉오동 주변의 독립군 주둔지였던 <대한 북로독군부>, 후방부대 주둔지인 장골과 <북로군정서> 주둔지인 서대파, 고려령, 군사 훈련소인 십리평, 안산, 도문 등을 방문하여 각 부대들이 봉오동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도 하였다. 10월 10일에는 봉오동 전투지역의 현장을 답사하여 <북로독군부> 본부가 있었던 마을 터 및 산위의 참호 등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2016년 11월 29일에는 창립기념 학술세미나를 열어 1920년대의 간도를 중심으로 한 무장 독립운동에 대하여 발표하였고, 특별히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주역이었음을 새롭게 조명하기도 하였다. 2017년도에는, 8월에 많은 역사학자와 교사들을 인솔하여 봉오동 전적지를 답사함과 동시에 연변지역 학자들과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12월에는 학술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최운산(1885-1945) 장군은 1885년에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는 왕창현의 총대(總代)로 활동하면서 10여개 지방(우리나라의 행정단위인 군에 해당하는 면적)을 개발 경작해서 봉오동, 도문, 석현, 서대파, 양수천자 일대의 토지를 거의 소유하게 되었으며, 1912년부터는 우리 동포들을 마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자위단을 창설하여 사병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15년에 이르러서 두유, 제면, 술 공장과 대규모 축산, 곡물의 생산과 무역을 경영하여 북만주 지역의 제1 거부가 되었으며 그 재산을 쾌척하여 <군무도독부>를 창설하고 친형인 최진동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자신의 소유지인 왕창현 서대파에 <북로군정서>의 창설을 주도하고 무기와 식량, 군복, 군자금 등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 이르러서는 북만주지역의 흩어져있는 독립군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무기와 군비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대한 북로독군부>와 <사관연성소>를 창설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일제에 항거한 죄로 여러 차례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고, 1945년 7월 조국의 해방을 눈앞에 두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을 하였다. 장군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일생 동안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고 의롭게 살고자 했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 형제들이 지금은 모두 고초를 겪고 있지만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라”고 유언을 하였다. 이처럼 많은 공적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살아왔던 장군에 대해서 해방이후에도 사가들은 관심을 갖지 않았고 자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1977년에 이르러서야 장군의 공적은 건국훈장 대통령 포장으로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격되었다.

독립운동 연구의 새로운 지평

최운산 장군의 아내 김성녀씨는 1969년 남편에 대한 서훈을 요청하는 진정서에서 “독립군들이 통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토대는 독립군의 모든 장비, 식량, 피복, 무기 등을 최운산 장군이 책임지기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장군의 손녀인 최성주씨도 “무장 독립전쟁의 승리는 몇 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 낸 쾌거”라고 하였다. 최운산 장군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역사를 바로 잡는데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사 연구의 범주와 방향을 새로 잡아가는 것이다. 장군의 자손과 가족들은 역사의 진실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묻혀있던 간도지역의 역사적 사실이나 자료들을 발굴하고 정리하였으며, 많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역사를 바로 잡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최운산 장군에 대한 기록과 연구과정은 최운산 장군의 손녀인 최성주씨가 <한겨레:온>에 연재하고 있는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을 일독하기 바란다) 연변대학 역사학과의 김태국 교수는 봉오동전투를 단지 전투에서의 승리만으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봉오동전투 이전의 준비상황과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이후 밀산과 연해주로의 이동, 그 이후 북만주지역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전반에 대한 기초적 자료가 된다고 하였으며, 이제까지 봉오동전투와 만주지역 독립운동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던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되었으며, 앞으로 최씨 삼형제의 행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심도있게 연구한다면 한국 독립운동사, 한중 문화교류사, 북간도지역 이주한인 사회사 등을 모두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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