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욕망의 지배자와 인간의 지배자

내가 그들을 심문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는 이에 따라서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여행객이었고 우연히 시체를 보게 되었으며, 검시소 직원들이 시체를 운반하다가 빼돌리는 정황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군데 우리 일에 간섭하는 게요?"라고 따진다면 대답이 궁색해질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나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풀어야 한다.

환상이라는 이름을 지닌 잘 생긴 청년에게 먼저 물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며,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오?"

"나는 당신네 인간들이 좇는 욕망의 환상이오. 돈이나 권력, 명예는 물론이고 감각적인 쾌락이나 끝없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할 때 마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게 될 거라고 착각하게 하는 일이 내 일이오."

시체를 빼돌린 자가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상대의 말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경청하는 척이라도 해야 숨겨진 진실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욕망도 알겠고, 환상도 알겠는데, 도대체 그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이오?"

"무엇인가를 하고 싶거나 갖고 싶은 게 욕망이고, 그 욕망을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고 여기는 게 환상이오. 인간은 욕망에 지배당하지만, 그 욕망의 숨통을 쥐고 있는 건 환상이요. 환상이야말로 욕망의 지배자이자 인간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소."

나는 잘난 청년의 논리에 점점 빠져들고 있음을 느끼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그 환상은 결국 누구를 위한 환상이란 말이요?"

"당신네 인간들을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신들을 질곡에 빠뜨리게 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소."

일견 그럴듯하긴 하다. 어쩌면 환상은 삶에서의 필요악일까? 더 이상 질문할 거리가 궁색하다. 이번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의 사내인 환멸에게 묻는다.

"당신은 환상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왜 환상과 함께 다니는 거요?"

"나는 환상의 끝에 있고, 환상과는 이란성 쌍둥이라서 떨어질 수 없소."

"당신의 본질이 무엇이기에 환상의 끝에 있는 이란성 쌍둥이라는 말이요?"

"나는 환상이 끝난 뒤 찾아오는 비참함과 후회의 감정이오. 환상을 좇는 과정 중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과 분노가 수반되지만, 환상의 끝은 공허와 절망이기도 하고 참회와 적멸의 순간이기도 하오. 사람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오."

환상과 환멸이라?! 그럴 것이다. 인간에게 환멸만 있고 환상이 없다면 삶의 활기와 원동력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환상만 있고 환멸이 없다면 참회의 기능을 상실한 인간들이 환희와 분노에 광분한 나머지 세상은 이미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나는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그들의 직무 유기에 대해 따져야 한다. 도대체 이들의 주장과 시체가 사라진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알겠소. 그런데 아까 당신들이 시체를 들것에 싣고 앰뷸런스로 가는 도중, 어둠을 이용하여 시체를 빼돌린 듯 보였소. 시체는 어디로 사라진 거요? 그 정황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시겠소?"

"환상을 지나 환멸을 겪은 사람은 일순간 시체가 되는 것이오. 그리고 그 시체는 바로 소멸하게 되어 있소. 우리가 빼돌린 게 아니라 스스로 소멸된 것이오."

이들은 나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 시체는 누구의 시체란 말이오?"

"그 시체는 당신의 시체였소."

순간 당황하기도 하고 분노가 일기도 하여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 시체가 나일 수 있단 말이오?"

<계속>

* 대표사진 출처 : http://h21.hani.co.kr/arti/photo/oneshot/43717.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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