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시를 배회하는 이유

전연 뜻밖의 사실을 들었을 때 처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된다. 넌센스 퀴즈의 정답을 모를 때가 답답한 것이지 정답을 알고 나면 그것처럼 쉬운 것도 없다.

사라진 시체가 나의 자아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내부의 거센 저항과 반발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자 한없는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내가 본 시체가 자아의 주검이었다니? 내가 환생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면 혹시 내가 환생을 거듭하고 있기라도 한 것이오?'

"아니오. 환생과는 다른 것이오. 영혼의 나이테는 일생동안 생과 멸의 순환을 수도 없이 거치게 되어 있는데 당신이 어쩌다가 생과 멸의 장면을 본 것이오."

"당신들은 어떤 연유로, 그리고 하필이면 왜 오늘 내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오?"

잘생긴 청년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한다.

"인간은 대부분 삶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 버거워하고 있소. 그리하여 환상을 쫓으며 거기에서 즐거움과 위로를 얻으려 드는데,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소. 그러나 환상의 끝에는 늘 환멸이 기다리고 있었고, 당신은 늘 환상과 환멸의 관계를 규명하고 싶어 했소. 그것이 우리가 당신 앞에 나타난 배경이요."

어두운 표정의 중년 사내가 부연 설명을 한다.

"당신은 여태껏 환상과 환멸을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소. 기회만 있으면 환상에 잠겼다는 말이오. 그러나 당신은 환상의 끝자락에 있는 환멸을 정말 싫어했고 환상과 환멸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소. 우리가 당신 앞에 보이게 된 것도 당신이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이오."

무슨 소린가? 나는 이들을 초대한 기억이 없다. 초대받은 자가 있는데, 초대한 자는 없다. 내가 허깨비를 상대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이들은 분명 허깨비가 아니다.

환상과 환멸이 동시에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환상이 입을 연다.

"당신은 환상과 환멸의 순환을 싫어했지만, 한편으로 당신은 환상에 잠기고 환상을 쫓기를 열망하는 마음 또한 강렬하게 가지고 있었소.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이오."

보충 설명을 하듯이 환멸이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그 강렬한 열망을 멀리하고 있소. 우리가 이제야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신의 그 이중성에 기인하는 것이었소. 그 이중성은 일상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이렇게 낯선 환경에서 명확히 드러나게 된 것이오."

"그렇다면 이 낯선 도시로 여행을 오게 된 것도, 그리고 이 여름의 밤거리를 거닐게 된 것도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단 말이오? "

잘생긴 환상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을 한다.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소."

내가 한밤중에 이 낯선 도시를 배회한 것이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니? 이건 무슨 귀신에 홀린 느낌이다. <계속>

 

대표사진 및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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