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우리들은 함흥차사란 말을 자주 쓴다. 이 말을 두고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7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태조(太祖)가 만년에 왕업을 일으킨 함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북궐(北闕)로 행행하고 나서는 대궐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 매번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청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후로 보낸 사자(使者)만 10여 명이었는데 모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함흥차사이다.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이 비분강개하여 자신이 가기를 청하였다. 함흥에 이르러 멀리 행궁(行宮)이 바라보이자 일부러 새끼 말은 나무에 매어 두고 어미 말을 타고 가는데 말이 자꾸 뒤돌아보며 머뭇거려 나아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상을 뵙게 되자, 박순은 상왕(上王)의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였기 때문에 상왕이 반갑게 옛일을 얘기하며 정성껏 대접해 주었다.

상왕이 묻기를,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둔 것은 어째서인가?”하니, 대답하기를,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 두었는데,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헤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미물(微物)이라도 또한 지극한 정인가 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니, 상왕도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루는 박순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마침 쥐가 새끼를 물고 가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도 서로 저버리지 않았다. 이에 박순이 다시 바둑판을 밀고 땅에 엎드려 우니, 상왕이 슬피 여겨 곧 대궐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박순이 하직하고 돌아가려는데, 상왕이 속히 가라고 하였다. 행재소에 있던 신하들이 앞 다투어 그를 죽이도록 청하였으나 상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으리라 추측하고 사자(使者)에게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으면 추격하지 말라 하였는데, 박순이 우연히 급작스러운 병에 걸려 그때까지 배 안에 있으면서 강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요참(腰斬)하고 돌아오니 상왕이 크게 통곡하며 이르기를, 박순이 죽으면서 무어라 하던가? 하니, 사자가 대답하기를, 다만 북쪽으로 행궁을 향하여 부르짖기를, 신은 죽습니다. 원컨대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지 마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자 상왕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박순은 어렸을 적의 좋은 친구이다. 내가 지난번에 한 말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어가를 대궐로 돌렸다.

태종이 박순의 죽음을 듣고 놀라 애통해하면서 등급을 더하여 진휼(軫恤)하고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그의 반신(半身)을 그리도록 함으로써 그 사실을 드러내었다.

함흥차사란 말의 유래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마광남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