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병역거부자 .... 라는 표현이 옳다.

한겨레 신문 1면에 대문짝하게 병역거부자의 영광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세상에!! 상류층 진입의 관문이라는 사법고시에 붙고도 그 영광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다니 .... 이런 자랑스러울 데가 .... 일단 사법고시와 병역거부를 연결시킨 데스크의 숨은 의도가 찜찜하다. 그가 사법고시를 패스한 명문가의 자제임에도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스스로 감옥행을 택했다는 것에 대한 존경의 의도가 두드러진다. 천박한 계급주의 인식에 다름 아니다. 그가 그저 평범한 종교적 병역거부자 였으면 일면에 대문짝만한 얼굴 사진을 얻지는 못했으리라.....

 

단도직입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병역의 의무는, 공동체의 양심을 바탕으로, 구성원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 정해진 것이고 그 양심을 따르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들이 양심...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종교적 병역거부 혹은 사상적 병역거부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가납할 수 있으되 종교적인 문제로, 설사 손에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신념이 아주 양심적인 것이라고 해도, 병역거부는 불법이고 그는 범죄자에 다름 아니다. 양심 ... 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아주 좋은 의미를 전달할 때 쓰여진다.

 

좋은 일은 본보기가 되어서 모두 다 따라 해도 좋은 일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손에 무기를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그 종교의 교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모두다 병역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특정 종교의 교리에 따라서 병역을 거부하는 것에 양심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은 대다수의 양심적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차라리 종교적 병역거부자 라고 하면 더 많은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유지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 상존함을 전제로 한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것이 공동체에 해를 끼친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전제로 공동체가 존재 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약속이 법이고 그 법에 따른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에서도 보듯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법을 거부하는 것은 일정 부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다만 악법도 아닌 현행법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 ‘양심’ 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하기 싫지만 공동체의 규칙이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따르는 대다수의 양심적 병역의무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한겨레가 대부분 옳은 말은 하면서도 독자의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근본주의적 진보 개념에 별 비판의식이 없는 것도 일조를 한다고 생각한다.

 

일 년에 몇 번은 이런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기사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주변에 의견을 구해보면 비단 나뿐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심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유독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게 한겨레가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말도 한다. 그렇다면 모두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을 쓰면 되는 것인데.... 그것 역시 그리 어렵지도 않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라는 표현 대신 종교적 병역 거부자 라는 표현을 쓰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들만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 들이라면 공동체의 양심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가. 만약 양심적 병역거부 라는 표현과 종교적 병역거부 라는 표현 중에 선택하라고 투표를 한다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들이 광범위한 독자들이다) 종교적 병역거부자 ... 라고 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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