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조상의 피맺힌 효성과 슬픈 이야기가 한 토막

 12. 적치재와 충효 정려

 

조성면 대곡리 중촌 마을에서 율어면 최남단으로 넘어가는 재를 속칭 '적치재'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리는 데는 옛 조상의 피맺힌 효성과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지나가고 정유재란이 터지자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정의와 구국의 깃발을 들고 분연히 일어선 창의사 이경남. 자는 하경(夏卿)이다. 변이중 장군의 막하장으로 금산 무주 등 곳곳에서 전공을 세워 그 충의를 다하였다. 공은 특히 충효를 실천한 분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왜적이 멀리서 침입해 들어온다는 급한 연락을 받았다. 우선 공은 늙으신 아버님을 안전지대로 피신시키려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70 넘은 노부를 등에 업고 뒷골짜기로 빠져 적치재, 그 가파른 재를 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적치재를 넘다 매복해 있던 적병에게 발각되었다. 공은 피신 도중에 노부가 시장할 것을 염려하여 준비한 미음을 담은 대통 지니고 있었다, 이를 본 적장은 공의 효성에 감동하였는지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얼마 못 가서 또다른 적병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불문곡직하고 업은 아버지와 함께 아들까지 베고 말았으니, 애석하게도 이 효자의 한이 맺힌 선지피는 못다 모신 어버이의 피와 함께 땅과 풀을 븕게 물들였다. 산악에 정이 있고 풀과 나무에 기가 있다면 산골짝은 분연히 통곡으로 메아리 쳤으리라.

그 뒤로 이 재를 붉은 피에 젖은 재라하여 붉을 적(赤) 재 치(峙)자를 써서 ‘적치재’라 부르게 된 것이다.

▲ 매월당<구글이미지>

그 후 조정에서 공의 갸륵한 효성을 널리 세상에 펴기 위해 효자정문과 중훈대부 군자감정을 증여하였다. 이 정문은 지금도 동구 앞에 수백 년 비바람을 이기며 의젓하게 서 있다. 효자의 충과 효를 기리며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어버이 섬기는 정성을 다하도록 말없는 교훈을 주고 있다.

더구나 중촌 마을은 일찌기 조선 태종의 둘째 왕자요 세종대왕의 형이 되는 효령대군이 정계를 떠나 이 마을 안통을 사비지지(나라에서 땅을 하사 받아 살 수 있게 해준 곳)로 사시던 곳으로 지금도 그 터에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기초석과 굵은 돌저귀 흔적의 돌이 남아 있다.

당시 전라감사로 있던 이경남 효자의 증조부 이세정(世貞)이 이곳을 순찰 중에 효령대군과 만나 이 감사의 아들이며 이 효자의 조부인 이수완(李秀莞)과 대군의 재당질녀와의 혼담이 이루어져 마침내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이수완은 구례 등 4개 읍, 현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만년에 이곳에 정착해 매월당(梅月堂)을 건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바 있어서 그의 손자 이경남과 같은 충효를 갖춘 분을 배출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매월당이라는 서재만이 지금도 옛 모습을 지닌 채 넓은 들녘을 굽어보며 의연히 고적다운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 매월당 2<구글이미지>

이곳 후예들은 지금도 외손봉사(외손들이 제사를 모심)하고 있으며 후손들도 긍지로 삼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참고 : 湖南倡義錄, 全南道誌,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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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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