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크산티페의 눈물

무의식을 관장하는 영적 존재들이 흥분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인다.

"그 여인이 환상이 아니라, 구원의 여인상에 대한 당신 마음이 환상인 거요."

"당신은 대부분 환상들을 극복했소. 그러나 한 가지 극복하지 못한 게 있소.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의 환상이요. 환상과 환멸의 순환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환상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성적 환상 때문이었소."

플라톤의 '사랑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인 걸 어쩌겠는가. 여자와 남자의 관계란 멀리 있자니 너무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자니 너무 껄끄러운 관계다.

"구원의 여인상에 대한 환상이 삶 속에서 성적 환상으로 나타나고 있단 말이오?"

무의식 세계에 속한 영적 존재들이 묵묵부답인 채로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구원의 여인상은 모든 남자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환상일까? 남자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그 환상 때문일까. 그리하여 남자들은 결혼을 하고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걸까. 구원의 여인상을 상실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감각적 쾌락을 안겨줄 '환상 속 미지의 여인'을 쫓으며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려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들은? 여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랑의 환상은 어떤 걸까? 여자들은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걸까. 그리하여 백마 탄 왕자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고 바가지를 긁는 걸까. 또한 헤어지거나 이혼한 후에는 새로운 '백마 탄 왕자 후보감'을 물색이라도 하려는 건 아닐까.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고, 여자는 남자에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유기불안이 깊은 무의식의 밑바닥에 깔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짝'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며, 여자는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도 견디기 어려워하는가보다.

프란츠 카프카가 약혼을 세 번이나 하고도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가정을 꾸려가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감 외에도 사랑의 환상이 깨질 것이 두려워서는 아니었을까? 악처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毒杯)를 마시고 자결하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들의 말에 모순이 있다. 구원의 여인상이 나타날 테니 잘해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그 구원의 여인상이 환상이라니?

"구원의 여인상이 환상일진대,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거요?"

"환상을 끝장내기 위해서라도 그 여인과 결혼해야겠지요. 다만 결혼에 성공한다 해도 그 여인이 구원의 여인상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소? 살다보면 환상은 깨지고, 사랑은 어느덧 식을 것이니."

운명은, 자신을 기꺼이 따르는 자들은 이끌어 가고,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질질 끌고 간다. 세네카가 한 말이다. 그런데 운명이 어떤 방향인지 알아야 기꺼이 끌려가든, 강제로 질질 끌려가든 할 게 아닌가?

"사실은 그 여인은 구원의 여인상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을 뿐 '불멸의 구원의 여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 오히려 당신이 선택한 여인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발견하는 게 나을 거요. 그것이 당신 앞에 놓인 삶의 과제라고도 할 수 있지요." <계속>

대표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선정 영화사 100년 100편/ http://tip.daum.net/openknow/38613922?q=%ED%95%9C%EA%B2%A8%EB%A0%88%EC%8B%A0%EB%AC%B8%20%EC%84%A0%EC%A0%95%20%EC%98%81%ED%99%94%EC%82%AC%20100%EB%85%84%20100%ED%8E%B8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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