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랑과 시간에 대한 회한

사랑의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그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롤랑 바르트가 일찌감치 간파하지 않았던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나는 구원의 여인상을 사랑한 게 아니라 구원의 여인상을 차지하겠다는 나의 욕망을 사랑한 것이다. 내가 그 욕망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택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식었을 때 그 여인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까?

"환상이 깨지고 사랑이 식은 여인에게서 어찌 구원의 여인상을 발견할 수 있겠소?"

칙칙한 인상을 한 사나이가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인간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황에 따라 미움으로 변할 수 있는 소유욕과 중독된 집착에 불과하오. 그 사랑에서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을 떼어내면, 영혼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오. 그 과제를 이행하지 못하면, 당신에게 구원은 없소."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내와의 불화로 집을 나가 객사한 톨스토이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아내 소피아를 얼마나 미워했던지, 죽으면서도 ‘나의 장례식에 저 여자만은 데리고 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순수한 영혼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 자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종교적 영역에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다.

'영혼의 타락과 구원'을 다룬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는도다. -

'오직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로 의역되기도 하는 이 말에서 여성적인 것은 여성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포용과 평화 같은 모성애적인 사랑을 뜻한다. 타인들이나 다른 민족을 대할 때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대한다면 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이는 아내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발견하라는 것과 뉘앙스는 다르다. 그러나 여성과 구원을 연결시킨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라는 것은 모성애적 사랑으로 회귀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쉽지 않은 과제다. 다른 의문도 있다. 톨스토이에게서 보듯이 인류애와 부부애는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골몰하던 차에 젊은 환상과 칙칙한 환멸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임무를 마쳤으니 이제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오. 새벽이 밝아오고 있소."

그러고 보니 어둠이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언제 또 볼 수 있는거요?"

꿈을 꾸는 듯 모습의 멋진 청년 환상이 다정하게 말한다.

"당신이 초대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늘 당신 곁에 있으니 섭섭해 하지 마시오."

중년의 사나이 환멸이 사뭇 진지하게 환상의 말을 이어 받는다.

"베풀지 못한 선행, 주지 못한 사랑, 낭비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註)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환멸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내 마음에 울려 퍼졌다.

이제 무의식 세계에 속한 영적 존재들과의 대화를 마칠 때가 되었다. 신비하며 숭고하기까지 한 밤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어둠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다. 여행자의 밤이 아무리 길다 해도 마냥 밤을 지새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무의식을 관장하는 영적 존재들은 어둠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듯 보였다. 이들 영적 존재들이 작별을 고하며, 시체가 사라졌던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낯선 도시를 배회하다가 만난 우연치고는 꽤나 흥미롭고 소중한 만남이었다.

밤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내 앞에 나타날 구원의 여인과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한껏 기대를 품으며, 나는 숙소로 돌아와 때늦은 잠을 청했다. 또 다른 미지의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끝>

 

*註 : 영국 시인 필립 라르킨의 시 <새벽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

- 날이 밝아오자 마음은 텅 비어간다. 베풀지 못한 선행, 주지 못한 사랑, 낭비해 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 때문도 아니고,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잘못된 시작을 바로잡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아예 그럴 수도 없어 비참해지기 때문도 아니다: 영원히 완벽한 공허, 우리가 옮겨 가선 항상 길을 잃고 말 그 명백한 소멸 때문이다.

대표사진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688669.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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