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포진의 수군

가리포진 성은 1522년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초대 첨사 이반(李班)은 1522년 7월에 발령을 받았다. 이반 첨사는 3년간 근무를 하면서 성을 쌓고 수군 600으로 해상방위의 기틀을 마련한 첨사였다. 가리포진은 국방과 왜침의 방비가 주 임무였으며 치안과 행정의 일부와 산림보호도 병행하였으며 조세, 송사, 민적은 강진, 해남, 영암에서 관장했다. 그러므로 진의 관가에는 6방(吏, 戶, 禮, 兵, 刑, 工房) 관속과 금송(禁松) 등을 위한 약간 명의 향사집강(鄕舍執綱)을 두고 대민 업무를 수행하였다.

주민들은 병무에 직접 참여하여 군비증강에 노력하였고, 특히 84대 황응길(黃應吉)첨사와 163대 진덕이(陳德履)첨사 때에는 전선강(戰船溝)을 두고 전선을 만들고 성을 증개축 하였으며 장정들은 예비수군이 되어 훈련을 하고 유사시에는 직접 참전하였다. 이는 유사시 바로 노를 저을 수가 있었기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가리포진의 군비와 그 규모를 보면 지휘관으로 종3품 첨사 1명, 군관(軍官) 30명, 기패군(旗牌官) 15명, 진무(鎮撫) 40명, 계 86명이고, 전선별 승선인원을 보면 래자전선(來字戰船) 1척에 사부(射夫) 18명, 포도(捕盜) 2명, 화포장(火砲匠) 10명, 선직(船直) 10명, 능노군(能櫓軍) 100명, 기수(旗手) 21명, 라장취수(羅杖吹手) 20명으로 205명이었고, 구선(龜船)은 1척에 사부(射夫) 18명, 포도(捕盜) 2명, 화포장(火砲匠) 10명, 포수(砲手) 24명, 선직(船直) 10명, 능노군(能櫓軍) 100명, 기수(旗手) 12명, 라장(羅杖) 3명으로 도합 179명이 승선하였다.

다음으로는 방패선(防牌船)은 1척이고, 사부(射夫) 6명, 포수(砲手) 6명, 화포장(火砲匠) 3명, 노군(櫓軍) 16명으로 31명이 승선하였고, 병선(兵船) 2척에는 사부(射夫) 20명, 포수(砲手) 20명, 타료격군(舵繚格軍) 30명으로 70명이 승선, 사후선(伺候船) 4척은 타격(舵格) 각 5명으로 20명, 가왜선(假倭船), 수토선(搜討船) <훈련용선박>은 6척으로 평상시에는 사병처(士兵處)에서 관리사용하고 훈련시에는 2척씩 윤번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가리포진의 전선은 래자전선(來字戰船) 1척, 구선(龜船) 1척, 방패선(防牌船) 1척, 병선(兵船) 2척, 사후선(伺候船) 4척, 가왜선(假倭船), 수토선(搜討船) 6척으로 15척의 전선이 있었다. 373년간 지속된 가리포진은 1584년 7월 5일 발령을 받은 228대 이범규(李範珪) 첨사를 마지막으로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기 직전까지 운영 되었다.

다음은 봉수(烽燧)로 1고(庫)에는 장졸 66명, 봉산금송(封山禁松,경내황장목보호)에 50명, 원동진부문(院洞津夫文, 원동나룻배 사공) 10명으로 가리포진이 운영되었으며 지휘관을 비롯해 승선인원이 모두 591명이고, 봉수와 산감, 나룻배 사공을 합하면 모두 717명이 근무를 하였다.

또한 가리포진에서 관장하는 진들을 보면 금갑진(金甲鎮), 마도진(馬島鎮), 이진진(梨津鎮), 어란진(於蘭鎮), 남도진(南桃鎮), 고금진(古今鎮), 신지진(薪智鎮), 삼도진(三島鎮)과 대정현까지 총괄하여 운영되었던 곳이 가리포진이었다.

이제 다시 옛 명성을 되살릴 수는 없는지 우리 모두는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편집 : 안지애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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