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주주통신원이자 ‘문화공간 온’ 이사장인 이상직 선생님은 ‘아름다운울타리’ 회장이다. ‘아름다운울타리’는 북향민(북한이탈주민) 50명, 전문코치(남한 자원봉사자) 70명 모두 120명으로 이루어진 북향민을 돕는 단체다. 지난 22일 회의 차 ‘문화공간 온:’에 들렀다가 이상직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을 보았다. 네 사람은 마치 가족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선생님은 북향 여성이라고 세 분을 소개해주었다. 세 분 모두 참 수수한 우리 여성 그대로였다. 그들과 스치듯 인사만 나누었고 말을 섞지는 못했지만 그분들을 보니 몇 년 전에 만났던 한 처자가 생각난다.

 

▲ 이사장님과 탈북 미인 3인(사진 : 김재광 주주통신원)

 

약 5년 전, 한 수녀님 소개로 대학 졸업기념 여행하는 20대 북향 처자 원희(가명)와 2박3일 함께 지냈다. 원희는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센터’에서 1년 넘게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동갑내기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원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4년 전, 중국 친척집에 갔다가 남한으로 보내준다는 브로커를 만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부모님은 원희의 한국행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외동딸인 자신이 북한을 떠나는 것은 곧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이기에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알리지 않았다. 당연히 탈북 비용 500만원도 없어 한국에 정착해서 취업 후 주기로 하고 왔다.

북에 살 때 그녀 집은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굶주려 북을 떠난 것이 아니다. 자신과 북한제도가  맞지 않았다. 원희 성격은 내성적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일주일에 2-3번씩 이어지는 청년모임은 정말 피하고 싶은 활동이었다. 남한 사회에 대한 동경도 북한을 떠나게 된 동기 중 하나였다.

탈출하는 과정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험했다. 중국에서 만난 브로커는 원희를 메콩강 건너 태국에 데려다주었다. 그 이전에는 몽고 사막에도 내려주고 제 갈 길을 찾아가라고 가버려서, 운이 없으면 며칠을 걷다 인가를 만나지 못해 탈진해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원희네 팀은 사막을 피해 태국으로 향했지만 메콩강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메콩강을 건널 때 배가 뒤집혀서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니...

다행히 태국에 무사히 도착해서 감옥 같은 태국수용소에 10개월 있다가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하나원’ 적응 기간을 거쳐 2년제 대학에 입학, 회계학을 전공했고 막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원희의 한국생활은 어떠했을까?

공부하는 것은 좋았다. 공부 말고 다른 모든 것은 무척 힘들었다. 이렇게 힘들고 서러울 줄 알았다면 왜 부모님을 두고 나왔을까~ 후회도 됐다. 외동딸로 곱게 자란 편이기에 부모님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 너무나도 다른 남한 사람들의 생활습관, 단체숙식 생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차별,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들로 많이 힘들었다.

원희는 1년 넘게 계속된 공동생활센터에서 나와 독립을 하고 싶었다. 직장 구하는 길이 독립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직장 구하는 일에 전념했지만, 직장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서류전형에 통과 되더라도 면접에서 다 탈락했다. 북한말투를 들으면 왠지 면접관들이 차갑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취업과정에서 느끼는 차별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남한사람들에게 느끼는 차별도 있었다.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내려왔는데 남한 사람들은 같은 민족으로 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북한말투를 들으면 바로 무시하고 거리를 둔다고 느꼈다. 도대체 남한 사람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북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접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북향민들은 이런 차별에 견디다 못해 영국,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뉴질랜드 등 전 세계를 향해 떠났다. 그녀는 웃으면서 “우린 그야말로 글로벌하게 놀아요.”라 했다. 처음에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많이 갔는데 미국으로 간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게 되었다. 살 곳만 주고 언어도 되지 않는데 그냥 알아서 살라고 했기 때문에 막막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탈북민도 있었다. 그 다음에는 비교적 살만한 생활비를 지원하는 영국으로 많이 떠났는데 요새는 인종차별이 없는 캐나다를 많이 택하고 있다. 마치 유행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그녀는 어떨까? 난민신청 방법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망명을 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 보였다. 취직도 안 되고, 일상에서도 고된 날들이 계속되고, 차별에 대한 울분도 쌓여 간다면, 나 같아도 그 길에 솔깃할 것이다.

원희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점은 원희는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면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편이였다. 내성적이면서 표현이 좀 강하다고 느꼈는데, 이런 성격이 지속적인 차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좀 더 편안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 욕구인데 그런 차별을 참고 이겨내라고 말하기도 좀 어려웠다.

그런데 정말 그런 차별은 있을까? 솔직히 나는 북향민과 접촉이 거의 없는 편이라서 그들이 어떤 차별을 받는지 잘 모른다. 원희와 여행을 마치고 원희의 취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발이 넓은 사업가 한 분에게 원희 취업을 부탁해보았더니 돌아오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저도 북향민 써봤는데요. 딱 이틀 일하곤 나오지 않았어요. 연락도 없어요. 한참 있다 왔는데 이틀 일당을 달라는 거예요. 미안하다 이런 것도 없어요. 그래서 다시는 북향민 안 씁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제 주변 사업하는 사람들도 북향민 안 써요. 이런 말해서 뭐하지만 다들 ‘배신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큰 것, 국가를 배신했으니 사소한 것은 쉽게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지요.”

이 말을 듣고는 ‘세상에... 저렇게도 생각하는구나.’ 너무 놀라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북한을 떠나온 것이 배신인가? 국가를 배신한 건가? 북한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 살아야 했나? 그럼 폭력남편을 피해 도망 나온 것도 배신이겠네’ 이렇게 속으로만 분개했다. 입으로 뱉었다가는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참았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말에 한국 사회가 정말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 말투와 태도에서 은연 중 나오는 그들에 대한 멸시와 기피, 원희도 이를 느꼈겠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그런 차별에 원희는 분노했고, 결국 한국사회에 동등하게 낄 수 없다는 생각에 해외난민신청까지 생각한 것이다.

원희 취업을 걱정하니까 딸이 냉정하게 말한다. “엄마, 원희 취업은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해줘야 하는 거 아님?” 그렇다.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등을 통해 정부는 취업보호 등 여러 일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그 법이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라 아쉽기는 하지만.

하지만 취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북향민이 3만 명 중에 6.25 전 탈북한 내 아버지의 먼먼 친척이 있을 수도 있다. 북향민 모두가 그렇다. 그들은 우리와 그렇게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가깝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깝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만의 집단에서 폐쇄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예전에 북향민을 위한 전용산업단지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취업장 확보라는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들만의 세계로 더욱 고립시킨다는 점에선 추진해선 안 될 사업이라 생각한다. 이런 고립화는 언젠간 심각한 균열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에...

법륜스님은 <새로운 100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 통일은 어찌 보면 치밀한 계획과 협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 장벽을 넘고자 하는 동독주민들의 강렬한 열망이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 동독주민들은 왜 그렇게 베를린 장벽을 넘고자 했을까? 바로 거기에 '보다 나은 삶'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독주민들 마음속 서독 삶에 대한 갈망은 통일로 가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통일로 가야한다. 전쟁이나 북체제 붕괴보다는 서서히 북한주민들 마음속에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남한을 생각할 때 자연스런 통일이 오게 될 것이다."

법륜스님의 말처럼 현재 북향민들 삶 속에 '보다 나은 삶'이란 단어가 들어갈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자립과 취업 등 정부 지원정책도 확고해야 하지만 우리들 마음에 그들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아니 그것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와 같은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하는 태도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수녀님은 원희가 대학 졸업 후 취직해서 나갔다고 했다. 축하 차 밥이라도 한끼 먹자고 전화했으나 다른 사람이 받았다. 수녀님도 연락이 끊어졌다고 했다. 서러운 기억의 흔적들을 다 지우고 싶었을까? 원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에서 살던 외국에서 살던, 부디 좋은 사업장에서 따뜻한 사람들 만나 서로 마음을 나누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원희와 함께 걸었던 길. 원희가 가장 좋았던 곳이라고 했다.

* 북한이탈주민은 새터민, 탈북자, 탈북민, 북향민으로 불린다. 이 글에서는 북향민으로 통일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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