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휴가는 통영으로 정했다.

통영은 조선후기 남녘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자체적으로 동전도 발행하였다. 근대화되며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그러하였을 것 같다.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등 당대 쟁쟁하던 이들의 고향이며 정지용, 백석 등 유명인사가 찾아 자취를 남긴 도시가 통영이다.

▲ 박경리 안내문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고 해서 통영이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 전라, 경상 수군을 총 지휘하는 종2품 관직으로 임진왜란 발발 후인 선조26년(1593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이 삼도수군통제영이며, 약칭으로 통제영, 통영이라 했다. 초대통제사 이순신의 한산도진영이 첫 통제영이었다. 선조37년(1604년)에 제 6대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현 통영)로 통제영을 옮긴다. 이때부터 계획된 군사도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통영 안내문

먼저 미륵산을 올라 통영 시내를 한눈에 보려고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탔다. 통영 시내를 내려다보며 미륵산으로 올라간다.

▲ 미륵산 오르며 바라본 통영시내

케이블카를 내려 미륵산 정상가는 길에 여러 볼거리들이 많다.

▲ 돌로 만든 거북선

정지용이 노래한 통영도 시비로 만들어져 있다.

▲ 정지용 시비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 가에 얼마쯤 포전이 있고 언덕배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연 어업에, 혹은 어업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면 통영은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통영 근처에서 포획하는 해산물이 그 수에 있어 많기도 하거니와 고래도 그 맛이 각별하다 하여 외지 시장에서도 비싸게 호가되고 있으니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 “

▲ 미륵산과 한려수도 안내문

미륵산을 내려와 통영시내로 가는 길에 해저터널을 들렀다.

▲ 해저터널

1년 4개월 공사 끝에 1932년 11월에 동양최초로 개통한 해저터널이다.

▲ 해저터널 안내문

이곳이 육지와 미륵도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배도 지날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 해저터널

그 이야기를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이렇게 썼다.


“명정골 우물에서 서문고개로 가는 길을 되돌아서면 대밭골이다. 이 대밭골에서 서문고개 가는 길과 갈라진 길을 접어들어 줄곧 나가면 판데로 가게 된다. 판데는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에 쫓긴 왜병들이 그 판데목에 몰려서 엉겁결에 그곳을 파헤치고 한산섬으로 도주하였으나, 결국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는 곳이다. 그래서 판데라고 부른다. 판데에서 마주 보이는 미륵도는 본시 통영과 연결된 육로였는데 그러한 경위로 섬이 되었다. 미륵도에는 봉화를 올리는 고봉 용화산이 있고 그 아래에 봉수골, 더 내려오면 통영 항구가 바라보이는 해명나루가 있다. 바다에 가서 죽은 남편을 뒤따라 순사한 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용화산을 넘어서면 첫개와 그밖에 소소한 어촌이 있고, 넓은 바다를 한눈으로 굽어보는데, 대충 큰 섬만 추려도 사랑섬, 추도, 두미도, 욕지섬, 영화도 등 많은 섬들이 있다. 되돌아와서, 통영 육지도 막바지인 한실이라는 마을에서 보는 판데는 좁다란 수로다. 현재는 여수로 가는 윤선의 항로가 되어 있고 해저 터널이 가설되어 있다. 왜정시에는 해저 터널을 다이꼬보리라 불렀다. 역사상으로 풍신수길이 조선까지 출진한 일이 없었는데 일본인들까지 해저 터널을 다이꼬보리라 불렀으니 우습다.”

-다이꼬보리(たいこうぼり, 太閤掘) : 토요토미히데요시(높혀 太閤이라 부름)에게 바치는 굴이라는 의미.

▲ 해저터널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때 수많은 조상이 죽은 곳을 매일 밟고 지나는 다리를 놓기 싫어서 해저터널을 만들었다고도 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해저터널을 놓으려고 연습 삼아 만들었다고도 한다.

▲ 해저터널

옛날에는 차도 다녔다는데 요즘에는 도보만 가능해서 관광객들만 몇 보였다. 자전거타고 지나는 주민 한분이 계셨고, 동네 개도 혼자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해저터널 입구에 ‘용문달양(龍門達陽)’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데 바다를 지나 육지(양지)에 닿는 용문이란 뜻인데 터널을 지나 도착하는 곳이 산양(山陽)이기도 하다.

▲ 해저터널

동피랑으로 갔다. 동쪽에 있는 벼랑이란 뜻이다. 통영성 동쪽 끝에서 서 있던 동포루가 있는 동네인데, 요즘 골목골목 벽화를 그려놓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 동피랑 벽화

벽화가 되어버린 딸내미를 찍었다.

▲ 동피랑 벽화

 통영성 동쪽 끝에 있는 동포루에서 강구안을 바라본다. 전망이 좋다.

▲ 동포루

이제 서피랑으로 향했다. 서피랑은 동피랑과 달리 공원이다. 여기는 통영성 서쪽에서 서포루가 있다.

▲ 서포루

통영성은 꽤 큰 읍성이었다. 경남발전연구원조사연구보고서 제107책(이하 연구보고서라 한다.) 71쪽에 이렇게 나와 있다.

“통영성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거제도의 오아포에 둔 통제영을 선조 37년(1604)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고성 두룡포로 옮겨온 이래 점차 營門이 번창하게 되자, 74년 만인 숙종 4년(1678) 제57대 윤천뢰 통제사 때 왜적을 방어하고 생업지를 갈라놓는 두 가지 목적으로 세병관을 중심으로 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곽이다. 통영성은 여황산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세병관을 중심으로 사방 일대의 부속관아와 지금의 북신고개, 서문고개, 그리고 동무고개를 연결하는 높이 4m, 길이 5,696m의 성으로 성 안은 주민의 거주지였으며, 성 밖은 농경지였다. 한산만과 통영만을 조망하기 유리한 남쪽 경사면을 성내로 하고 성지의 남쪽으로 해자처럼 둘러싸인 북신만과 통영만이 1차 저지선의 역할을 하였다.”

대구읍성이 2,700m인데 통영성이 5,696m인 거를 보면 얼마나 중요하고 큰 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동포루와 마찬가지로 서포루에서도 전망이 좋다. 강구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 서포루에서 바라 본 통영항

세병관도 크게 보인다.

▲ 서포루서 바라 본 세병관


둘째 날 삼도수군통제영부터 찾았다.

통제영을 올라가는 길옆에 돌로 만든 토지대장군이 서 있다. 벅수다.

▲ 문화동 벅수

연구보고서 33쪽에 문화동 벅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문화동 벅수(중요민속문화재 제7호)

세병관 입구의 길가에 홀로 세워져 있는 石長丞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주민들이 벅수계를 만들어 1906년에 세웠다. 크기는 높이 201㎝, 둘레 155㎝이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서 약 25m 정도 떨어진 해안쪽에 좀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으나 도시계획에 의해 1983년 1월에 옮겨 왔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전면에는 “土地大將軍”, 뒷면에는 “光武十年 丙午 八月○日 同樂洞 立”이라 새겨져 있다. 문화동(文化洞)의 동북방에는 세병관(洙兵館)과 산이 있고 서남방에는 충무시내의 높은 지대가 있으며, 벅수는 이 줄기가 이어지는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이는 문화동 벅수가 악귀나 왜구의 침범을 막고 고을을 수호하기 위한 읍락비보의 기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외양을 보면 두상과 몸통의 크기가 대체로 균등한 편이다.

머리에는 탕건을 둘렀으며, 눈은 튀어나올 듯한 퉁방울이다. 입술은 옆으로 크게 찢어진 채 치아를 훤히 다 보이고 있으며, 송곳니 두 개가 뻗어 나와 공포감과 미소를 동시에 짓고 있는 듯하다. 토박이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매해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의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단절되어 현재까지 지내지 않고 있다.“

▲ 삼도수군통제영

통영이라는 도시를 있게 한 삼도수군통제영이 새롭게 잘 정비되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관공서에다가 박경리선생님이 다녔다는 학교도 있었다. 연구보고서 33쪽 설명을 본다.

“• 통영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통제영지(統制營址)](사적 제402호)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통할하던 본영이다. 초대 통제사 李舜臣은 한산도에 통제영의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나 丁酉再亂으로 閑山鎭營이 폐허가 된 후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되었다. 1604년, 제6대 통제사 李慶濬이 거제 烏兒浦에서 頭龍浦로 통제영을 이설함에 따라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1605년, 艅山 남쪽 기슭에 洗兵館을 창건하고 運籌堂, 경무당, 백화당, 병고 등 부속 건물을 차례로 건립함으로써 통영은 조선시대 유일한 ‘計劃軍事都市’가 되었다. 2000년부터 2013년에 걸쳐 당시의 통제영을 복원하기 위해 세병관과 주위의 학교와 관청을 포함하는 총 29필지 4만1,022㎡에 이르는 넓은 구역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복원공사를 하였다.“

▲ 삼도수군통제영 복원전

통제영은 세병관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즉 통영이 세병관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 삼도수군통제영 안내도

미륵산에서도 서포루에서도 통영에서 조금만 높은 곳에서 보면 세병관이 크게 보인다.

▲ 세병관

세병관은 정말 크다. 우리나라 목조건물중 가장 크단다. 자세한 설명은 연구보고서에서 보자.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

통제영 제6대 통제사 李慶濬이 宣祖38년(1605년)에 건립한 통제영의 客舍이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민흘림의 圓柱를 세웠다. 包는 외진 평주 위에만 枓을 짜 올린柱心包式이다. 세부적으로는 翼式과 多包式 수법이 절충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건물의 4면은 창호나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했으며, 뒷면 가운데에는 한 단 높은 마루를 설치하여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를 모셨다. 세병관은 17세기 초에 건축된 목조건물로 경복궁 慶會樓, 여수 鎭南館과 더불어 현존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큰 건물에 속한다. 위의 건축물과 함께 그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로 평가되어 2002년 10월 14일, 國寶로 승격되었다.

洗兵은 唐代의 문인 杜甫가 지은 「馬行洗兵」이란 辭에서 따온 것이다.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永不用”이란 글에서 보듯, 銀河水를 끌어와 갑옷과 兵仗器를 씻고 영원토록 쓰지 않았으면 하는 平和 希求의 염원이 담겨 있다. 현판의 글씨는 제136대 통제사 徐有大의 것이라 전한다.“

다른 거는 모두 관두고 단지 세병관 마루에 앉아 보기 위해서만도 통영을 찾아 올 만하다.

▲ 세병관에 앉아 바라 본 통영시내

건물 크기만큼이나 현판도 크다. 세병관 글씨는 서유대 제 136대 통제사가 재임시(1779-1781)썼다.

▲ 세병관 현판

삼도수군통제영을 나와 충렬사로 간다.

▲ 충렬사 가는 길

통영 충렬사(忠烈祠, 사적 제236호)는 제7대 통제사 이운용이 왕명으로 선조 39년(1606)에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충렬사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이 지었다는 강한루다. 시인 강위가 통영 풍경과 이충무공 위업을 강한의 고사에 연관하여 강한루라 이름지었다 한다.

▲ 강한루

오늘 제를 올리나 보다.

▲ 고유제 준비중

백석 시비가 충렬사 건너편에 있다. 충렬사 계단에 앉으면 바로 눈앞에 보인다.

▲ 백석 시비

백석이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18세 통영 아가씨 ‘란’에게 첫눈에 반해 몇 번 통영을 찾는다. 란을 못 만나고 낮술한 후 충렬사 앞 계단에 앉아 시를 쓴다. 이 후 그 란이란 아가씨는 백석의 친구와 결혼한다.

▲ 백석 시비

[통영(統營)2]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조아하는 사람이 울며 날이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짭한 물맛도 짭짭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조코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조코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ㅅ것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십흔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 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십허한다는 곳


산(山) 넘어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 이 갓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 집의 어린딸은 란(蘭)이라는 이 갓고


란(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山)을 넘어 종백(柊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가튼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잇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조아하는 그이가 잇을 것만 갓고

내가 조아하는 그이는 푸른가지 붉게붉게 종백(柊栢)꽃 피는 철엔 타관시집을 갈 것만 가튼데

긴토시 끼고 큰머리 언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女人)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종백(柊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날근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안저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나즌 집 담 나즌 집 마당만 노픈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찟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이 남긴 또 다른 통영이란 시다.
 

[통영1]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통영(남행시초2)]


통영장 낫대들었다

갓 한 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래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박효삼 편집위원  psalm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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