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력있고 전략이 뛰어난 진무성(陳武晟)

진무성은 여양 진씨의 후손으로 자는 사규<士赳>이고 호는 송계<松溪>라 하였다. 참판 인해(仁海)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찌기 무예를 익혔다. 27세에 이충무공의 막하장수가 되어 임진란 5월에 검사 김완, 만호 송희립과 함께 옥포, 사천 등의 해전에서 많은 공을 세웟다.

사량해전에서는 왜장 중 총지휘장을 직접 쏘아 떨어뜨리고 남은 적들을 섬멸하여 큰 승리를 거뒀다. 이에 충무공은 크게 반기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고 늘 선봉장으로 중용하였다.

또 고성전에서도 적 지휘장을 활로 쏘아 맞춰 죽이는 등 전투 때마다 활을 쏘아 적장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 진무성 생가<구글이미지>

 

계사 6월 진양성이 포위되었을 때 황진, 김준민, 장윤 등이 끝까지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였다. 이에 적정 탐문하는 일을 자청하였다. 왜적을 죽인 후 그의 옷으로 갈아입고 왜군의 장수라 속이고 입성을 하였다.

김천일, 고순후, 최경회 등이 반가워하며 손을 마주 잡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우리들은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원하건대 장군은 돌아가서 비적들을 소탕하라.”

이들의 뜻을 마음에 새기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 돌아왔다.

무술년 당포해전에서 적군 우두머리의 칼을 빼앗아 그의 머리를 베었고, 11월 노량해전에서는 이충무공이 순절하자 더욱 분전하여서 큰 승리를 거두고 회군하였다.

정묘호란에 임금님이 강화로 피난하시니 공이 삼도수군통제사 유문을 대리하여 3도의 수군의 배를 통솔하여 진군하였으나 풍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 동상<구글이미지>

조정이 이를 문제 삼아 군률(군법) 위반을 논의하게 되자 임금님이 하교하기를 “뱃길로 군사를 이동하는 것은 바람의 세력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책임을 묻지 마라.” 하시고, 군의 위세가 정연한 것을 보시고 “참으로 명장이라.” 감탄하시며 귀성부사를 제수(임명)하였다.

 

 

후에 호조판서를 추증하시고 흥양(고흥)에 사당을 세워 그 공을 길이 빛냈다.

▲ 가당<구글이미지>

 

<참고 : 山陽三綱傳,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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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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