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주통신원 김유경이 만난 사람들 1-3

- 정년(停年) 계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데, 첫째, 내가 움직일 수 있으면, 시력만 확보되면 할 수 있다. 보고 느끼고 해야 되니까. 돋보기를 쓴다든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년은 없는 거다. 준비한 특별한 것은 없고, 그래두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용돈은 쓸 수 있으니까. 맘 편한 건, 세가 안 나가니까(1년 전에 살림집 아래층으로 세탁소를 이전하면서 월세 부담이 사라졌다), 특히 집에서 하니까, 내 용돈만 벌어 쓰면 되니까 맘이 편하다.

- 세탁소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자녀(현재 아들은 대기업 계열회사 정규직이고, 딸은 결혼하여 외손자를 안겨줌)가 싫은 내색을 보인 적이 있는가?
큰애(아들)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세탁 세탁하고 많이 다녔다, 아파트 같은 데, 학교에서 애들이 놀렸나보다, 애가 그게 저기 하니까, 그때 아들이 이거 안하면 안 되냐고 한번...... 그 때는 공무원이 최고였다. 아빠는 출퇴근도 없고, 애가 그거에 대해...... 그 때는 좀 속상했었다. 지금은 뭐 애들이 덕 보지 뭐, 애들이 용돈 안줘도 되니.

- 세탁소가 살림집에 붙어 있으니까 좋은가?
내가 느낀 거는, 두 집 살림 안하니까 마누라가 편하니까, 그 전에는 조그마한 키로, 아장아장 뛰고, 애들 밥 주고, 뛰어와서 내 밥 주구, 이제 그런 게 없어졌으니까. 젊었을 때 고생한 거는, 고생이라 생각이 안 드는 게, 노후에 이렇게 편하게 되니까, 삶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지 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아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걱정 없는 거.

- 과거의 전업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또 이 직업을 택하겠는가?
현재가 만족스러우니까 그렇게 하겠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모를까, 다시 직업을 택하라 해도 택하겠다. 그 때 당시에 양복점을 닫고 일을 구할 때 나이가 많다고(30대) 일을 구할 수 없었다. 모르지, 여자로서는 맨 날 집에만 갇혀 있어서 답답했었는지 어떨지. (아내) 갇혀있는 건 괜찮은데, 나는 이 직업은 안 하고 다른 거 하고 싶다. 다른 거...... 지금은 딱히...... 지금은 만족하니까, 어느 땐가부터 만족하면서부터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예전에 안 해야 되겠다 생각할 때는 (남편) 물건 주고받는 거, 현금 들어오는 거 (아내) 메리야스가게, 건어물가게를 해볼까 했었다.

- 만족한 것은 언제부터였나?
(아내) 만족한 거는 한 10년 정도 됐을까? 지금은 아주 만족한데, 그때는 만족하기보다는 포기! 그 당시 돈이 없어 실천을 못하고, 그때는 그게(메리야스, 건어물) 성업이었고 세탁업은 신종이어서 힘들고. 하지만 지금은 재래시장에서도 동네에서도 그게 안 되니까 없어졌고 이거만 남았고. 그러니까 지금은 지극히 만족하는데, 확실하게 진짜 만족은 한 5년 정도. 그 전에는 그냥 포기! 되는대로 할 수 없이 한다는 포기! (남편) 인생은 똑 같은 거 같다. 좋은 점 있다가 나쁜 점도 생기고, 좋은 일 나쁜 일이 다 섞인 것 같다.
(아내) 우리가 양복점할 때 성업이었으면 그걸 하다가 좌절했을 수도 있었고, 우리 나이 때는 사양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었고, 그 전 연령대는 전성기였고, 그래서 그 전에 양복점 한 사람들은 건물도 사고, 우리 나이 때는 사양길에 들어섰다가...... 그러구보니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양복점 기술 있는 사람들이다. 중간에 세탁만 해야 되겠다는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 못하지 이거를. 듣는 거하고, 남이 잘 되니까 잘되는가 보다는 거 하고, 내가 진짜 여기서 열심히 부대끼면서 일하는 거하고는 다르다.
(남편) IMF때 세탁소 하는 사람들이 진짜 많이 생겼다. 명퇴한 사람들이 돈 많이 까먹었다. 남이 볼 때는 옷 받아서 기계에 넣어서 다려서 주면 끝나니까, 이론상 간단하니까. 그런 사람들 많다. (아내) 내가 세탁소 하기 전에는, 옆집에 세탁소가 있었다. 그 세탁소는 맨 날 일을 하니까 돈을 많이 버나보다 생각했다.
(남편은 들으며 웃음)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세탁소 하자고 했는데, 양복점 할 때는 최하 바지 맞추면 이만~이만 몇 천원했는데, 옆집에 모르는 거 물어서 이걸 했는데, 그 옆집 아줌마가 힘든데 그걸 왜 할려고 그래, 그래서 내가 돈 벌려구 하지 했는데, 내가 해보니까 이게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었다. 처음에는. 바지 하나가 드라이가 천원인데, (남편) 천원이었어? 난 기억 안 나,
(아내) 바지 하나를 맞춰도 몇 만원인데, 돈 천원을 받으니까 돈 같지도 않고 내가 뭐하는 짓인가, 그랬다. 근데 거기다가 은행 다니는 아저씨가 드라이(할 거)를 가져왔는데 800원에 해 달래. 200원 깎고.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돈을 200원을 왜 깎나. 안 깎아줬다. 되든 안 되든 큰돈 목돈을 받다가 흐지부지하게 돈을 받으니까, 성에 안차는 거다.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리고 손님은 나를 우습게 보는 것 같고, 그래서 다른 걸 하자고 졸랐다. 건어물 장살 하든지, 메리야스 장살 하든지 졸랐다.
(아저씨, 웃으며) 돈이 없었으니까 못 했다.

- 노후설계는?
(아내) 못했다. 어떻게 해? 생각은 있는데,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고, 우리가 이 상황에서 아들까지 결혼시켰으면 문제가 없는데, 아들을 아직 결혼을 못 시켰으니까 아들한테 해줘야 할 게 있다, 부모로서. 딸은 정말 별게 아니다. 사천만원으로 충분히 다 해줬다. 못해준 것 없이 해줬다.
그런데 아들은 그게 아니잖아. 집이 문제가 되니까. 우리 사위가 아파트 전세 얻는 거 1억7천 줬는데, 남자 쪽에서 줬는데, 나는 1억 정도는 생각도 못하지. 결혼을 안 시킬 때는 몰랐는데, 딸을 결혼시킬 때에는 그런 게 조금 바래지더라구. 집을 어떻게 해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그런데 걱정은 하면서도 물어보지는 못하겠고. 딸이 계약했다고 계약서를 가져왔을 때 다행이다 했는데, 내 아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야, 그 집이 대단하다, 그래두 그 많은 돈을 아들 결혼한다고’, 집에만 그렇게 한 거잖아, ‘난 우리 애가 결혼한다고 하면, 난 그렇게 안 되는데 큰일이다’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아들 결혼이 우리 노후와 연결되는 거다. 아들이 결혼하면 넉넉하진 않아도 어찌됐든 그 마무리는 해줘야 하니까. 우리 둘이 얘기할 때, 지금 우리 상황에서 아들이 결혼만 했으면 괜찮다, 그런다. 아저씨가 아프지만 않으면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지금 같으면 조금 있는 것도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맘이 놓이는데, 아들이 결혼만 했으면 걱정이 없을 텐데. (남편) 아들이 알아서 하겠지.

- 세탁소를 안하게 되면 이 공간은?
누구에게 세를 줄 거다. 비울 순 없으니까.

- 인생의 동지에게 하고픈 말은?
(남편) 난 없다. 잘사나 못사나 따라와 준 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 딱히 뭐라고 얘기할 건 없는데, 아프지만 않고 살면 그냥...... (남편, 웃으며) 아프지만 않으면 자기 용돈은 내가 벌어준다 이거지. (아내) 그 전 젊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남편한테 사랑 많이 받고...... 이제서야 그걸 느낀다. 애들한테도 많이 (받았다), 내가 애들한테 해 준거는 없는데...... 애들도 아빠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하면, 엄마에게 어찌어찌해라, 시장가서 뭐 좀 받아와라 하면 애들이 쫓아오고 그런 걸 생각해보니까, 참 내가 감사하게 잘 살았구나, 난 행복하구나, 그런데 그 전에는 잘 몰랐다. 지금은 나이 들어 생각하니까 참 감사하다.
(남편) 감사한 거는, 첫째로 종교를 가졌다는 거 자체가 고마운 거다. 둘이 살면서 서로 트러블도 생길 것도 조절이 되고, (아내) 종교적인 거는 큰 거고. 또 살면서 크게 굴곡이 없다는 거. 내 앞에 닥친 일만 열심히 하면 된 거였다. 시댁에도 힘들게 걸리적거리는 게 없었고, 친정도 저기한 게 없었고, 남편한테 속썩어본 적도 없고, 애들 땜에 막~ 속상해본 적도 힘들어 해 본 적이 없다. 애들한테 해 준 건 정말 없다.
(남편) 나도 애들한테 조금 미안한 거는 있다. 딴 집 애들에 비하면 같이 놀아준 적도 없고, 같이 여행 다닌 것도 없고, 그런 건 애들한테 미안하다. 내가 살아오면서.
(아내) 장사하는 사람은 애들한테 잘 해줄 수가 없다. 직장생활하면 노는 날은 어쩌다가라도 애들을 위해서라도 어디라도 나가기라도 하겠지만, 나, 한 번 나오면 집에 못 들어간다. 애들이 학교에서 늦게 오면, 그걸 못 해 준 게......
(남편) 둘이 엇나가지 않고, 모나지 않고, 그게 종교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일만큼은 성당 열심히 나가지만, 위에서 지켜봐주는 분이 계시지 않은가, 살아온 과정이 있다. (아내) 애들에게 고맙다. 우리는 부모니까 그런데, 우리는 애들한테 진짜 고맙다.
(남편) 다른 집 애들 하는 거 보면, 우리 애들은 정말 잘한다. 월급타면 엄마아빠에게 잘 해줄라 그러고, 숨기는 것 없이 다 얘기해주고, 아들 자랑 같아 누구한테 말은 안하고 살지만, 초등학교 때도 반장할까 할 때, 뒷바라지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대학가서는, 동아리 회장할 때는 풍족하겐 못줘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지원을 했고. (아들이) 나가서는 친화력은 있나보다. 한 동안은 공무원시험 본다고 꽤 오래 있었다. 삼십 넘어 접고, 취직한 지 한 3년 됐다.
(아내) 그때 생각하면 애한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그랬다. (남편) 우리 가정사가 다 나오네? (아내) 결혼하면서부터 다 들어갔다. (남편, 허락을 구하고 담배 피우러 나감) (아내는 아들의 공무원시험 낙방과 현 직장에 취업하기까지의 심사를 기막히게 좋았던 꿈 이야기와 함께 들려줬다.) 시험 전날 꿈도 꾸고, 시험 보는 날 기도 중에 응답도 받고, 그래서 붙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떨어졌다 그래서, 할 수 없다, 다음에 또 볼 거냐 물었더니, 접어야죠, 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다.
(아들 사랑이 지극함을 알 수 있는 얘기들이 잠시 더 이어졌다. 어스레한 시각이 되어 남편은 오후 일을,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인터뷰를 마쳤다.)

2시간여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두 분에 대한 인상이 선명해졌다. 막연히 맘씨 좋은 이웃에서 기꺼운 삶을 일군 오롯한 주체로 다가왔다. 나이 들어 마주한 삶에 대해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원앙의 회고는, 평범함이 거저 유지되지 않음을 새삼 일깨웠다. 정리한 글에는 빠졌지만, 신심이 두터운 남편 유영석 씨가 나(종교 노마드)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쁜 선물이었다. 끝으로, 인터뷰 중에는 높임말로 주고받았음을 밝힌다.(끝)

김유경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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