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있어야 내일도 있다.' 이것은 연속적 사고의 소산이다. 내일의 중요성을 알지만, 오늘에 더 비중을 두고, 오늘 현재에 더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건 어떨까?

'오늘이 있지만 내일도 있다.' 비슷한 말이지만 위의 말과 뉘앙스가 다르다. 오늘은 비록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내일은 좀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스며있다.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는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내일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사드 배치로 인한 논란이 뜨겁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재인 정부를 이해하자는 쪽과 결정적인 패착을 두었다며 평화협정 체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진영이 한 치 양보도 없이 대립해 있다. 카톡방이 후끈 달아올랐다. 상대방 주장을 공격하다보니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갑자기 분기탱천한 마음이 들어 양 팔을 뻗어본다. 왼 손끝으로 오른 손끝을 잡아보려 하나 잡히지 않는다. 이번에는 오른 손끝으로 왼 손끝을 잡아보려 했으나 역시 잡히지 않는다. 둘 다 내 손인데 서로의 손끝이 닿지 않는다. 양팔을 뻗은 상태에서는 분열과 대립만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팔을 내려 본다. 양 팔을 내리고 보니 비로소 왼 손끝과 오른 손끝이 정겹게 서로를 마주 잡는다. 양 팔을 내리는 것은 겸손함이다. 뻗대는 마음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 때 그 깨달음에서 나오는 자세이기도 하다.

오호라. 신체에서도 이렇게 쉽게 교훈을 얻어낼 수 있구나 하고 내심 만족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손'이 나를 재촉한다. '팔'에서보다 더 귀중한 교훈을 자신에게 얻을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한다. 그래서 '손'에게도 기회를 준다.

손바닥이 손등을 나무란다. 그렇게 딱딱하고 굳어서야 어떻게 물건인들 하나라도 잡겠느냐?? 라고

그러자 손등이 손바닥을 힐책한다. 그렇게 연약해서야, 부드럽기만 해서야 어떻게 외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라고

다 같은 내 손이고 쓸모가 제각기인데 서로 자기만이 옳다고 한다. 손등과 손바닥이 합쳐지고 협력해야 진정한 손이 완성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말이다. 손등이 있어야 손바닥은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고 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손바닥이 없다면 손등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대한민국이 자중지란에 빠졌다. 트럼프와 시진핑 사이에서 곤혹을 치르느라 힘겨운 판에, 자중지란으로 운신의 폭마저 줄었다. 한국 사회는 푸르른 가을 하늘을 맞아 9월의 하루를 이렇게 보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다. 그 내일과 미래는 분명 더 나은 사회, 더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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