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안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11일

나는 유라시아 길을 달리면서 진정한 동서 문명의 원형을 찾고, 우리 조상의 삶과 지혜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이 길은 인류 숨구멍 같은 길이다. 이 길을 통해 인류 문명이 숨통을 틔었고, 서로 만나며 숨을 쉬었고, 종교를 넘나들며 문화와 인종이 교류하였다. 이 길이 막혔던 중세는 암흑기를 맞았다. 이 길에 유라시아 철도가 놓이고, 고속도로가 깔리고, 파이프라인이 연결되는 날, 인류는 더 평등해지고, 더 평화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지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서로를 부비며 섞으면서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길 위를 걸었다. 길 위에는 언제나 소통과 나눔을 통해서 꽉 막힌 체증 같은 것을 풀어주는 뜨거운 기운이 있다. 길을 나서는 것은 바로 그 기운을 누리기 위해서다. ‘실크로드’. ‘비단길’. 이 아름다운 이름 길은 내가 지금 그렇듯이 비단을 즈려밟고 가는 낭만적 길이 아니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비단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길이었다.

보다 나은 곳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본능인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더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목숨을 건 이주를 계속한다. 우리는 이들을 난민이라고 부르지만 옛날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약 6백만 년 전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살다가 대략 4만~5만 년 전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인류는 태어난 곳을 떠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1만 년 전에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지구의 전역에 인간들이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나는 9월 9일 오늘 우리 한인 이민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독일 교포들과의 뜻 깊은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반세기 전 간호사로 광부로 독일에 와서, 한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 독일에는 약 5만의 교포가 산다고 한다.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에 가장 많이 살지만 내가 지나온 이곳 에센과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겔젠키르헨, 오버하우젠은 우리 광부들의 지난 애환이 서린 곳이다.

엊그제 박선유 재독 한인회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토요일인 9일에 에센 한인회관에서 동해·독도 세미나가 있는데, 독일 전역의 한인 인사들이 모이니 인사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유라시아대륙횡단 평화마라톤'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도르트문트에서 조스트로 하루 더 이동해왔고 그곳 숙소로 12시 조금 지나 박회장님이 오셨다. 아침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모님과 축구협회 회장과 번갈아 운전을 하고 온 것이다.

에센으로 이동하는 중에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박회장님은 1973년에 오셨고 사모님은 1965년에 독일에 오셨다고 한다. 더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않았다. 가는 동안 한국에서 카카오톡 전화가 왔다. 독일 처음 왔을 때 부모한테 안부전화 한번하면 가족들이 신기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바꿔가며 전화기를 돌렸고, 전화비가 많이 나와 고국에 송금할 돈이 줄어들어 걱정했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회관에 들어서자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회관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포스터가 붙여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은 간단한 육개장에 김치반찬이었지만 보름 만에 먹는 쌀밥이라 꿀맛처럼 달았다. 사실 맛이 문제가 아니라 한식을 못 먹고 양식으로만 때우니 대장기능에 문제가 생겨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 다니느라 번거롭다.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날인데도 동해·독도 세미나는 독일 각지에서 약 150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오래 외국에 살면서도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이런 소중한 마음들을 잘 엮으면 큰 힘이 될 텐데! 과연 나의 달리기가 그런 역할에 조금이라도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1960년대 초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구었고 한국은 헐벗고 가난하여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 때였다. 실업자는 넘쳐났지만 일자리는 없었다. 가난은 숙명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다. 돈 버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할 당시, 신문에 난 구인광고가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켰다. 500명을 모집하는 탄광의 구인광고였다. 그런데 장소가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독일이었다. 소위 막장이라 불리는 탄광 광부를 뽑는 광고였지만 500명 정원에 4만 6천 명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대학졸업자였다.

▲ 애센 한인회관에 걸려있는 제 1차 독일 광부 사진

1963년 광부 247명이 처음 독일에 도착했다. 모두 3년간 취업 계약을 맺었다. 1977년까지 8,395명의 광부가 독일 석탄 광산에서 일했다. 1965년부터는 한국인 간호사의 독일 취업이 허용되었다. 1976년까지 모두 1만 371명이 독일로 떠났다. 역시 3년 계약이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해야하는 일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였다. 광부들은 지하 1,000m의 막장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렸으며, 간호사들도 처음에는 시체를 닦는 일 등 병원애서 가장 힘들고 남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았다. 이들 월급은 한국으로 송금되어 가족의 생계비와 학비로 쓰였다. 이들이 먹지 않고 쓰지 않고 송금하는 돈이 국가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회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려있는 ‘우리들은 코리안 엔젤이었습니다’란 시 한 수가 눈길을 끈다.

▲ 에센 한인회관에 걸려있는 시' 우리는 코리안 엔젤이었습니다.

“그 날은 이역만리 독일로 가는 날 / 김포공항의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며 /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차마 놓을 수 없었던 / 생이별의 눈물은 꽃으로 갓 핀 우리들에게 / 살을 에는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웠습니다.

- 중략 -

반세기 전 가난에 아픈 조국을 치료하기 위해 / 이역만리 독일을 향했던 우리들의 소망이 / 대한민국 경제의 마중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는 / 자랑스런 명예와 긍지로 살아가는 우리들 / 우리들은 영원한 코리안 엔젤입니다.”

그 코리안 엔젤 재독한인간호사협회 윤행자 회장님이 필요할 때 쓰라고 비상약품을 챙겨왔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하여 광부로 다시 독일에 왔다는 분은 내게 꼭 완주를 하라며 손을 꽉 잡아주었다.

간호사는 가난한 조국을 치료했고 광부는 희망을 캤다.

▲ 왼편 아래 비상약품을 챙겨주신 윤행자 회장님.

독일교포와 만난 다음 날인 9월 10일은 조스트에서 Delbrück까지 달렸다.

▲ 2017-09-10 조스트에서 Delbrück까지 달리면서 만난 이정표
▲ 2017-09-10 조스트에서 Delbrück까지 달리면서
▲ 2017-09-10 조스트에서 Delbrück까지 달리면서
▲ 2017-09-10 조스트에서 Delbrück까지 달리면서. 왼쪽은 친구 딸이 응원삼아 그려준 그림.

9월 11일은 Delbrück에서 데트몰트까지 달렸다. 

▲ 2017-09-11 Delbrück에서 데트몰트까지 달리면서 만난 이정표
▲ 2017-09-11 Delbrück에서 데트몰트까지 달리면서
▲ 2017-09-11 Delbrück에서 데트몰트까지 달리면서
▲ 2017년 9월 1일에서 9월 11일까지 달린 길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페이스북 페이지(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에서 확인 가능하다. 또한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6870)과 만분의 일인 1.6km를 동참하는 런버킷챌린지 등의 이벤트를 통해 후원과 함께 행사의 의미를 알리고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6,0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 시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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