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공 최지계(崔池繼) 부사

최지계는 조선 인조임금 때 충신으로 자는 언숙(彦叔), 호는 표곡(豹谷)이다. 본관은 충주 최씨다.

고려 말 왜구 침탈이 극심했을 때 전라도 도원수였던 이태조가 정지 등과 더불어 서기 1535년 4월(공민왕 2년 갑오년) 반남현과 회령현(보성)에서 수천의 왜구와 적선을 토벌하고 멸살시켜 도민의 불안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이때 분충창의 중흥공신 판3사사 충원부원군으로 용맹을 떨쳤던 지용기(池湧奇)의 10대손이 바로 최지계 부사이다. 어린 시절 용기와 예절이 크고 의연하였으며 무예와 용기가 뛰어났다.

서기 1623년(인조원년 계해년) 관서행영(평양의 행궁 등을 지키고 운영하는) 도원수 장면의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이 되었다. 이듬해 갑자년에는 영변에서 반란을 기도한 부원수 이괄이 강적을 보내어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강적의 목을 베었다.

▲ 병자홓란 2

정충신, 남이흥, 이수일 등과 함께 안현에서 적을 쳐 크게 전공을 세워 진무공신으로 책훈되고 ‘충성군’의 봉을 받았다.

서기 1632년(인조9년 신미년) 신천군수, 의주판관을 지낸 뒤 서흥 부사가 되어 선치를 베풀었다.

서기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원수 김자묵의 소모장으로 서흥검수첩에서 호병을 맞아 싸워 수백명의 목을 베었다. 용전분투하였으나 말이 죽고 최지게는 부상을 당하여 더는 싸울 수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산성으로 철수하던 중 신계 서목곡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 북향 4배하고 칼을 잡고 자진 순절하니 때는 서기 1637년(인조15년) 정월 4일이요, 향년 45세였다.

▲ 병자호란 1

인조께서 관을 동원해 제사를 모시고 특별히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서하였다. 고종 18년(신사년)에 임금님이 정려를 명하시는 은전을 베풀었다. 광주 병대사에 모시고 향배 하였다.

 

<참고 : 高麗史本傳과 節要 仁祖實錄, 國史大辭典, 韓國人名傳, 全羅南道史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 1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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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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