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과 합세한 후 협공하여 적을 소탕하고 조정에 우두머리를 잡아 바친 공훈

영조조의 영웅호걸 윤동교(尹東郊)선생

영조 때 문무를 두루 갖춘 내 고장이 낳은 영웅호걸 윤동교 선생은 숙종 3년 병진년에 복내면 유정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칠원 윤씨이며 칠원 부원군 윤공의 후예로 주부대간의 손자다.

이도암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일찍이 학문과 덕성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숙종 34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보안승 예조좌랑, 장연현감을 거쳐 문겸선전관이 되었다.

영조 4년 무신년에 산음 현감으로 재직 시 역적 전희량, 이인좌가 모반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다. 반란군은 거창에서 승승장구하더니 지나는 길의 모든 읍을 석권하였다. 이에 윤동교 공은 전투복을 벗지 않고 7주야 동안 성을 지켰다. 적도들을 회유하여 반란군을 흩어지게 한 후 용감하게 싸웠다. 성초역에서 정희량의 죄를 선포하고 귀순하기를 권유하니 반란군이 모두 흩어졌다.

거창에서 관군과 합세한 후 협공하여 적을 소탕하고 조정에 우두머리를 잡아 바치는 공훈을 세웠다.

▲ 고향 마을

탕무원종훈(반란군을 소탕한 공신록)에 기록되었고 위원군수를 제수 받았다. 평안도 위원군수 겸 위원진병마검제사로 재임하다가 영조 7년 55세에 운명하였다.

공의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군민의 숭앙 대상이 되었기에 위원읍에 선정비를 세워 길이 기념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은 치적보다도 조선 문학 중흥에 기여한 업적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담 송환기의 묘갈명선(묘비에 새긴 글 중의 모범된 글을 모음), 매산 홍직필의 묘자선(묘에 관한 기록 모음), 이조판서 심이면의 묘표선(묘비의 글 모음), 이판 김병운의 문집서문의 신도비명, 고산 임현매 등의 많은 글을 남긴 업적이 후세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고종 9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5위도총부 도총관을 추증 받았다. 복내면 장천리에 신도비를 세우고, 향리 사람들의 추모로 유정리 덕암에 사우를 세워 춘추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조판서 서유훈과 규장각직제학 조연흥이 축문을 지어 바쳤다.

▲ 정자

공이 후세를 가르치던 덕암제는 윤씨 후예 뿐 아니라 향리 자제들의 수학 도장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후손은 유정리를 비롯한 노동, 복내, 장흥, 서울 등지에 살고 있다.

 

<참고 :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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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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