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무심히 서 있는 추모비

때 : 2017년 9월23일 14시30분 ~15시

장소 :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누가 : 한겨레온<한겨레주주 통신원 및 가족>

무엇 : 홍덕문 애국지사 추모비

후원 : 경기북부보훈청, 한겨레:온, 민족문제연구소경기북부지부

[소요산 입구에는 구한말에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덕문의 추모비가 있다.]

점심을 끝내고 출발을 하여서 조소앙 기념관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러서 보고 가자고 들른 곳은 바로 이 소요산 입구 부근에 있다고 안내가 된 홍덕문 애국지사의 추모비였다.

우리가 들러서 해설을 듣고 사진을 찍는 동안 주변에 계시던 어르신들이 우리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계시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해설을 듣는 분도 계시고 사진을 찍으면서 “친일파 청산!”을 외치자 박수를 치면서 호응을 해주시는 분도 계셨다.

바로 도로변에 세워진 비각을 그리 크지도 않고 찬란하지도 않았다. 비각 앞의 도로변에는 잠시 쉬어갈 벤치가 비치 되어 있어서 상당한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어르신들만이 우리 행사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역시 우리가 펴든 펼침막에 항일의병이라는 말이 적힌 것을 보고 관심을 가져 주신 것 같았다.

홍덕문 선생 추모비에 대한 기록은

[한말의 애국지사 홍덕문의 추모비로,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에 있다.

1919년 3·1운동 때 경기도 동두천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뒤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홍덕문(洪德文, 1864~1923)을 추모하는 비(碑)이다. 1975년 홍덕문의 애국·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동두천노인회 주관으로 시민의 성금을 모아 세웠다.]라 되어있다.

김재관 선생님은

“홍덕문 선생은 한말의 애국지사로 휘는 병준, 본관은 남양이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음력 2월25일<양력 3월26일> 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출옥을 한 후에도 일본헌병이 가한 형독<매를 맞은 상처와 독>으로 인하여 수년후 고향인 걸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1975년 시민의 성금을 모아 소요산 입구에 추모비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의 앞면에는 [애국지사 홍덕문 추모비]라고 음각하였고, 뒷면에는 선생의 행적으로 새겼다.”라는 소개 글을 주셨다.

홍덕문 선생 추모비의 규격이며 지사각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높이 2m, 너비 0.8m의 크기에 지붕돌을 갖추고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몸돌 앞쪽에는 ‘愛國志士洪德先生追募碑(애국지사 홍덕문선생 추모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은 1991년 세운 정면·측면 각 1칸의 비각(碑閣)에 모셔져 있다. ‘志士閣(지사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비각은 높이 5.7m, 폭 3.4m 규모에 이른다.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입구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덕문 추모비 [洪德文追募碑] (두산백과)

현장에서 김재광 선생님은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추모비라서 더욱 뜻깊은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추앙받는 항일 지사로 어린이들에게도 알려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자랑스러운 분들의 행적을 이렇게 찾아 남기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다시 강조하였다.

아마도 참여한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간단히 묵념으로 대신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조소앙 기념관을 찾아 출발하였다.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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