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님이 잠시 피난하여 은신하던 쇠실마을

백범 김구(金九)선생의 피난처였던 쇠실(深松)부락

보성읍에서 순천 방향으로 약 5km 되는 지점 안치(그럭재)를 넘어 왼쪽으로 약 1km쯤 들어가면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아담한 마을이 있다. 이곳이 쇠실마을이다. 정확한 이름은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심송(쇠실)부락이다. 바로 이 쇠실마을에서 김구 선생이 잠시 피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범(白凡) 김구(당시에는 김창수(金昌洙))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32세손 김순영의 외아들로 1976년 7월 12일 황해도 해주군 장곡면 백운방 기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종 31년(1894) 갑오년 선생의 나이 열아홉이었을 때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뻗히기 시작했다. 이듬해 을미년 8월 20일 개국 504년이 되는 해에는 일본인 삼포오루(三浦梧樓) 일당이 명성황후 민중전를 궁중에서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일인들이 고종황제의 거처인 건청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옆의 녹산으로 끌고가 난도질한 후 불태우다가 남은 시신을 향원지에 버리고 달아난 사건.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슬퍼하였다. 침략자 왜구를 누구보다도 미워하였기에 국모 살해의 슬픈 소식을 듣고는 하늘을 뚫을 듯 분노하였다. 애국심이 불타올라 비장한 각오를 하고 三浦 일당을 찾아 헤매다 마침내 황주에서 진남포로 건너가려는 삼포일당, 국모 살해의 직접 하수인 사전양량(土田讓亮: 당시 일본군 중위)을 치하포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려죽이고 지니고 있던 짐을 풀어서 돈 800냥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동장에게 맡겼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동 김창수’라고 방을 써 붙이고 태연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국모 살해 사건이 있었던 이듬해 1896년 2월 하순의 일로 사건이 일어난 지 120여 일 후였고 선생의 나이 21세였다.

그해 선생은 인천 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강화 병마우후 벼슬을 하던 김주경이란 분이 선생에게 보내는 문안쪽지에 ‘후일 큰일을 위해 탈옥하라’는 뜻을 담은 시를 보고 탈옥을 감행하였다.

 

脫籠眞好鳥 跋扈豈常鱗

새장을 빠져 나오는 새가 진정한 새로다.

쑥이에서 뛰쳐나온 고기가 어찌 범상한 고기일까보냐

求忠必於孝 請看倚閭人

충신은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를 생각할 지어다.

 

탈옥을 한 후 선생은 멀리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피신하다 심송(쇠실)부락에 이르렀다. 종친 김광언과 김덕언을 찾아가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송도에 사는 김두호라 칭한 뒤 40여 일을 체류하다가 떠났다. 떠날 때 마을의 선정국(宣正國)모친 안씨가 신행선물(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시문(詩文)이나 물건을 줌)로 필랑(필통처럼 쓰이는 주머니)을 하나 주었다. 선생은 <동국역대>라는 책을 정표로 주면서 책표지에 다음과 같은 석별(떠남을 아쉬어 하는) 시를 써서 주었다.

 

離別難 離別難 離別莊處花樹開

이별하기란 어렵고 참으로 어려운데

이별함에 일가의 정이 솟구칩니다.

花樹一技分絶半 半留宗家半行帶

꽃나무 한 가지를 꺾어 절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한 가지는 행리에 담고 떠납니다.

生今天地逢何時 捨此江山去亦難

이 세상 살아서 언제 또 만날 것 인고

이 나라 강산을 버리고 가기 또한 어렵습니다.

四員同遊至月餘 주齬別而 去也

한 달 여를 한가히 놀고 지냈는데

일이 잘못되어 아쉬워하며 덧없이 떠납니다.

훗날 이 글을 보게 되면 혹여 지금의 나를 회상할 것인지요... 정표로 남겨두고 멀리 떠납니다.

<4연 후미의 첫 글자는 ‘어긋날 주‘ 자인데 인터넷 검색이 안 되어 찾지 못하였다.>

그 후 백범선생은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40여 년간 항일투쟁하며 오직 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다. 마침내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국 광복의 땅을 밟으며 귀국하였다. 1946년 9월 하순에 옛 추억이 남은 쇠실 부락을 다시 찾아(백범이 쇠실을 찾아오신다는 소식에 보성군에서는 보성역에서 쇠실 마을까지 깨끗한 황토를 깔아 선생님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고 함) 40여년 전을 회상하며 그때 따뜻한 대접을 해주었던 부락민들에게 감사드렸다. 선정국씨의 모친을 찾아서는 떠날 적 받았던 정표의 ‘필랑’을 내보이고 자신이 기거하던 방과 지내던 곳을 두루 살피고 훗날 기어이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따니셨다.

이렇듯 쇠실 마을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별이요 위인이며 선구자이고 애국자인 백범 김구선생의 성스러운 향기가 넘치는 역사의 고장이 되었다.

 

<참고 : 韓國獨立功勳史, 白凡逸志, 寶城便覽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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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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