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살이하던 안규홍, 의병대장이 되어 왜적을 물리치다

무신 창의 안규홍(安圭洪) 의병장

 

▲ 뮤지컹 의병장 안규홍 광고판

강제로 맺게 된 을사조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왜병들은 지방에까지 나타나서 감시를 하였다. 안규홍은 보성읍 우산리 출생이었지만 문덕면 법화리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1907년(융희원년) 경미년 겨울 어느 날 안규홍은 젊은 나무꾼 10여 명과 같이 나무를 하러 갔다. 가던 중에 왜병 5명을 만났다. 총을 세워놓고 식사를 하다가 안규홍 일행을 보고 의병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대답을 하는 척 가까이 다가가서는 총을 빼앗고 왜군들을 잡아 죽인 다음 이들은 의병이 되기를 결의하였다.

▲ 뮤지컹 의병장 안규홍 창의 장면

이듬해 2월 300여 명의 의병들이 함께 뭉쳐서 모두의 뜻을 모았다.

대장-안규홍/ 부장-염재보/ 참모장-송기휴, 양동훈/ 선봉장-이관회/ 좌우를 담당할 장수-김도규, 임민호, 손덕호, 정기찬, 송경회, 장재창/ 유격장-안택환, 소휘천/ 참모-오주일, 라창운/ 서기-임정현/ 군수 책임자인 군수장-박제현/ 연락과 첩보-유우삼으로 결정하여 군부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의병군은 여러 크고 작은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3월 26일에는 적의 중대장 영호구웅(永戶久雄)이 인솔하는 왜병 육군 8중대가 순천에서 보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듣고 득량면 파청 부락 앞의 비둘고개(鳩峙)에 전 병력이 매복하였다가 통과하려는 왜병장 영호대장 외에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의병의 고장 보성군에서 가장 유명한 파청대첩이다.

안대장은 이 전투에서 왜병에게 빼앗은 무기 등 수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문덕면 대원사로 향하였다. 그 후 문덕면 양가랭이재, 동복 운월치, 복내 서봉산 등에서 대소 접전하여 왜적들을 수없이 체포하거나 사살하였다. 그해 7월 28일 순천지구 주둔 헌병대와 기마대 대장 도변연추(渡邊廷秋)가 합동으로 우리 의병을 습격하자 왜병을 문덕면 웃 진산으로 끌어들여 크게 승리를 거둬 파청대첩에 버금가는 큰 전공을 세웠다.

▲ 뮤지컹 의병장 안규홍 일경에게 문초

그 후에 십여 차례 격전을 치루면서 수많은 의병 뿐 아니라 라창운, 박활, 이관회, 안택환, 임정현, 이영삼, 소휘천, 박우진, 송기휴 등의 중진들도 전사하여 크게 힘들게 되었다. 게다가 왜적들은 의병 가족들에게 갖은 협박을 가하는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탄환과 군수도 끊겼다. 싸울 힘을 잃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해 1909년 8월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해 9월 안규홍은 문덕면 법화리에서 정기찬, 손덕호와 함께 왜병에게 체포되었다. 대구 형무소에서 1912년 5월5일 처형되고 말았다.

담산 안규홍대장이 의병을 일으킬 때 복내면 반곡 안극 참봉과 미력면 송림 박보현 참판이 안규홍의 창의에 찬동하고 군내 대가였던 두 참판은 배후에서 군수품을 공급하였다. 이런 배후를 숨기기 위하여 안 참봉은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학장소 일송정을 불지르기도 하였는데 이렇 듯 두 분에게 거짓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또 파청대첩 후에 합세한 강성인이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고 군사 규칙을 자주 어기니 안대장은 강성인의 목을 배어 의병정신과 군사규율을 바로 잡았다.

일본 패망 후 파청대첩지에 전승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1963년 2월 1일 건국공로훈장을 그의 손자에게 수여하여 안대장의 충성스러움을 칭찬하여 영원히 빛나게 하였다.

 

<참고 : 韓國獨立運動史, 全羅南道史, 澹山實記,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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