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담살 장군 휘하에서 파청대전을 치른 후로도 항일 활동은 계속되는데..

의병용장 염재보(簾在輔)의 혈전기 1

염재보는 1868년 보성군 문덕면 내동 부락에서 염종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잘 만지기도 하고 직접 만드는 것도 좋아하였다. 특히 총포에 관심이 많아서 제작, 조립하기도 했다. 물론 사격도 명수여서 백발백중의 묘기를 보였다.

▲ 염재보의 집터

염재보는 성격이 강직하여 강한 사람에게 눌리지 않고 약한 사람은 부축해주는 인정 많은 분이었다. 그가 30세에 접어들 무렵은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사조약, 정미년 7월의 조약 등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횡포가 날로 노골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애국심에 불타는 공은 이런 나라꼴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의병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몰래 동지들을 모으는데 온힘을 다하였다.

곡성의 면암 최익현 선생과 1906년에 비로소 뜻이 통하여 의거를 맹세하고 최선생의 격문(의병으로 나서자는 통지문)을 널리 퍼뜨려 의병을 모았다. 1908년 봄에 지혜와 담력이 있는 안규홍을 대장으로 삼고 자신은 부장을 맡았다.

손덕오, 김도규, 임민호, 소천술, 장윤지, 염치명, 박활, 김구희, 임정현, 안군명, 염규범, 안찬재, 임재명, 황봉대, 정기찬 등 50여 명의 찬동을 얻어 의병대를 창설하고 무기를 정비하여 실제 전쟁에 나섰다.

전쟁 준비를 마친 후 일어난 중요한 사실들을 간추려보면,

- 1908년 3월 : 미력면 석호산에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비밀을 지키는 법,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 적을 무찌르기 위한 전략 등과 어떻게 부하를 가르치고 이끌 것인가를 가르쳤다. 그리곤 병사들을 훈련시켜 단 시간에 어느 군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예 의병대를 만들었다.

- 3월 중순 : 문덕면 동소산에서 의병대를 훈련하며 확실한 방침을 세웠다. '국권수호(나라를 지켜내자), 안민보호(국민을 편안하게 보호하자), 토색엄금(권력을 휘두르며 백성을 괴롭히는 임을 엄히 금한다) 한다', '간두(좀 같은 간신들)와 창도(군을 갈팡질팡하게 이끄는 사람)를 죽인다'. '왜구의 초류(일본 도적들을 본받는 행위나 말)도 금한다'

- 3월 23일 : 조성에 행군하여 지방 사람들을 괴롭힌 자들을 몰아냈다.

- 3월 26일 : 득량 파청의 비둘기고개 대첩에서 맨 앞장서 지휘한 왜적 8중대장 영호구웅(永戶久雄)을 비롯한 수십 명을 사살하고 영호구웅의 지휘검을 비롯한 많은 무기를 빼앗아 백성을 안심시키고 대원사에 개선하였다.

- 4월 29일 : 왜적 헌병기습부대를 대원사에서 미리 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쳐부수어 여러 명을 사살하자 적들이 도주하였다. 또다시 큰 전과를 올렸다.

- 4월 7일 : 문덕면 가령재에서 유격전을 벌여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 4월 13일 : 화순에 주둔한 왜적 헌병을 동복면 운월치에서 대전하여 12시간 격전 끝에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우산리의 아군 박활이 전사했다.

- 4월 26일 : 복내 서봉산에서 군대를 점호하고 있던 새벽 시간 적의 기습을 받아 아군 조병기가 거느린 수명이 전사를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안대장과 둘이서 고지를 점령한 뒤 적 수명을 사살하고 포위망을 뚫은 후에 적을 퇴각시켰다.

- 7월 28일 적 기마부대(도변정추부대)와 순천지구 주둔 헌병대가 힘을 합쳐 합동작전으로 습격하였다. 이들을 문덕면 웃 진산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쳐 수십 명을 사살하였으나 아군의 탄환이 떨어져 적을 더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 1908년 8월 초 : 복내 원봉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기습하여 여러 명을 잡아 죽이고 주둔 막사를 불태우니 적이 장흥으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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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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