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강제에 의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충성스런 의사 열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한말의 애국지사 백홍인<白弘寅> 선생

 

▲ 백홍인<白弘寅> (1874-1952) 호남 항일운동의 중심이 된 학자 사진: 보성군청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의 마수를 뻗쳐 오고 있던 한말의 나라 모습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만 하였다. 일본의 강제에 의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충성스런 의사 열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특히 삼남지방 일대의 유학자들을 한데 묶어낸 큰 학자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인 백홍인 선생은 구국의 큰 뜻을 품고, 스승 면암 선생을 비롯한 송연제, 송심석 선생과 뜻을 모아 삼남을 중심으로 8도에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보내기로 하였다.

경고동지사우문<警告同志士友文:모두 의병에 나서서 싸우자는 격문>을 만들어 면암선생의 이름으로 8도에 보내는 한편, 자신은 남도 13개 군의 전달을 책임지고 격문을 돌리다가 제주도로 가는 도중 고종 43년<1907년> 3월에 왜병에게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리 있는 선생의 말에 오히려 설득이 될 만큼 왜적도 말문이 막히었다.

▲ 면암 최익현 (1833-1906) 조선말기의 애국지사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면암 선생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까지 진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전주, 남원에서 패전하여 생포된 후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일체의 모든 활동을 스스로 한 것임을 주장하였으며 그해 8월에 면암선생은 석방 되었다.

이렇게 면암이 석방 된 사실을 알게 된 백홍인 선생은 또다시 동지들을 모이게 하여 망국의 한을 씻고자 준비하던 차에 7월에 면암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경술년 8월 29일<1910년>에는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면암의 제자들 50여 명이 집 뒷산에 올라 큰 소리를 내어 통곡을 하고, 나라를 구할 대책을 세우고 있던 중 일본 헌병들이 포위를 하자, 전원이 서로 나부터 잡아가라고 나서며 자원하여 모두 붙잡혀 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면암 선생의 제자들로 면암 선생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으므로, 선생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며 함께 슬픔을 달래는 것이 무슨 죄인가?”하고 조리 있는 답변으로 결국 석방되었다.

그 후 서산채미가<西山採薇歌>를 만들어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나라를 구하는 길은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952년 12월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수원백씨로 자는 자행<子行>이고, 호는 세심당<洗心堂>이며 웅치면 유산리 부춘동에서 태어났다.

면암의 손자인 河山 최원식의 추천으로 부춘동 장춘제<長春齊> 앞에 강학유허비<사람을 가르친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웠고, 병신년에 성균관으로부터 사당을 짓고 향배<유학에 공이 많은 분을 선정하여 향교에서 제사를 모시게 허락함>하라는 통지문이 내려왔다.

* 참고자료 : 山陽三綱傳, 寶城郡誌, 崔勉菴, 宋權淵純齊命, 宋心石 등 文集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 

* 출처 : 전자책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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