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600년의 한양 조선에 왔건만 인걸은 간데 없고...

학교 친구들이 송년회를 어디서 할까 궁리하다가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가자고 하는 의견일치로 우리는 지난 12월 7일 경복궁을 찾게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우리는 만났다.

경복궁 나들이의 동선을 우리 다섯사람이 나누어 준비하고 설명하면서 효율적인 경복궁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면서 전 충남대학교 최관삼 교수의 제언으로 오늘의 송년의 자리는 이렇게 이곳 경복궁 방문으로 만들어졌다. 

▲ 궁궐 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으로 3문 형식이고 가운데 홍예문은 어도이다. 마침 그날 '광화문'의 표기를 "문화광"으로 하여 달기를 하면서 연구를 하는 담당자의 열정에 감사를 드린다. 사실 경복궁의 모든 표기는 좌에서 우로 표기가 되어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송년의 기념 자리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저 뒤로 조선의 경복궁 근위병의 복장에서 낯선 이질화를 발견하게 된다.

경복궁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의해 세워진 궁궐이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 화평전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며 태조 3년인 1394년 음력으로 10월 25일에 개성을 떠나 마침내 그달 28일 이곳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자문을 받아 경복궁을 세우고 조선을 유교적 이상국가로 세워 가기로 한다.

뒤로 높이 솟은 북악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거리가 시원스럽게 열려있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동서로 해태 두 마리가 마주 버티고 있었다.

▲ 경복궁의 바로 뒤에는 웅장한 북악산이 두 눈과 코가 선명한 사람의 얼굴로 와 닿는다. 필자는 조선 500년의 기운이 바로 이 큰바위얼굴(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로 '감수성이 예민한 주인공이 큰바위얼굴에 동화되면서 신화속의 영웅으로 변한다'라고 나는 문화유산해설사로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그림을 만번 보게 되면 그 이미지에 동화되어 버린다고 설명해준다. 그래서 대상이 학생들인 경우 책상위에 자기가 존경하는 위인의 사진을 붙여 놓으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공감을 받고 있다. 앞에 보이는 탑은 민속박물관의 지붕이며 더 앞의 건물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이다.

궁성의 동남쪽과 서남쪽 양 모퉁이에 망루인 동십자각, 서십자각이 있고, 동서 북쪽으로 건춘문과 영추문 그리고 북쪽으로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청와대를 마주하게 된다.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들이 소실되었고 그후 창덕궁, 창경궁은 복구되었으나 경복궁은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가 1865년 고종2년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된다.

하지만 1895년 8월에 일본의 깡패들에 의해 우리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896년에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니 경복궁은 그 임무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궁궐은 훼손되어 지금은 약 30%만 남게 된다. 경복궁은 사적 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1에 위치하며 연 면적 약 127,000평(416,990평방미터에 이르며 궁궐내에 있는 근정전과 경회루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그들의 조선을 침략하면서 3.5도 남산의 신궁을 향하게 조선총독부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수모를 당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때 복원되면서 경복궁은 광화문부터 근정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한편 일제에 의해 조선총독부인 중앙청을 지으면서 경복궁이 크게 훼손된 것을 김영삼 대통령때 그 일제 잔재 조선총독부를 헐어버린다.

▲ 일제는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만들었다. 저 조선총독부는 헐려졌으며 그 돌들은 저지않은 곳인 대한항공의 호텔을 짓기위한 송현동의 공터 - 당시 미국의 미대사관의 식구들이 사용하던 곳의 담을 만들었다.

그 조선총독부의 파괴된 화강암의 돌들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송현동의 대한항공의 호텔을 짓기 위한 공터의 담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대한항공은 이전에 삼성에서 사들여서 호텔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바로 그 옆에 풍문여고와 덕성여중고가 담넘어에 있기때문에 짖지 못하다가 현재는 담보된 상태이다.

▲ 910년의 일제의 국권창탈로 일제는 경복궁을 헐고 조선총독부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 일본의 나쁜 공직자들은 이곳의 공터에 숙소를 만들고 일등급의 군인들의 보초아래에 이곳에서 36년간을 지낸다. 그리고 1945년 미군정으로 이곳은 미대사관의 직원들이 인수되어 최근까지 지내다가 지금은 용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곳은 삼성에 팔리고 다시 대한항공에 팔린다. 그후 저 멀리 덕성여중고와 풍문여고가 보이는데 이곳에 대한항공은 호텔을 지으려고 하다가 결국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땅은 방향을 잃고 있다. 아직도 해방되지 않은 공간임을!!! 아무도 볼 수없도록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일제시대에는 경복궁을 헐고 그곳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그곳의 일본 요직의 간부들의 숙소를 이곳에서 36년간 그리고 일제가 나가면서 다시 미군정으로 주미대사관의 직원들이 이곳을 숙소로 사용하였다. 이 부지는 삼성에서 구입했다가 다시 대한항공의 부지로 매매된다. 일제때에는 일본의 최일류 부대의 군인들이 주변에 보초를 서다가 다시 미군의 최정예 해병대가 이곳의 사방에 보초를 서면서 이곳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나고 미군정이 되면서 송현동의 이 부지는 광화문의 미대사관의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용산으로 물러나면서 결국 삼성이 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 이곳은 해방되지 않은 공간이라고...

▲ 경복궁을 거닐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의 모습이다. 외국 관광객 특히 중국인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입장한다. 중국의 결혼한 신혼 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는 말해주었다. 중국이 통일을 바라듯이 우리도 남과 북의 코리아가 하나의 코리아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공감한다면서 빨리 통일을 바라는 소망을 갖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경복궁의 어디에도 우리의 반쪽인 북조선의 관광객은 없다. 어서 통일이 되어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저들은 이곳 조선 경복궁을 활보할 날이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중국의 신혼으로 보이는 남녀가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있다. 경복궁의 꽃 - 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로서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등의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많은 건물 중에서도 최고의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 고종4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곳 조정에서는 또한 과거시험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임금의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을 배경으로 삼았다.

▲ 국보 제223호 근정전앞에서의 전 충남대학교 최관삼 교수는 한옥은 정면으로가 아닌 모서리에서 선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설명해준다. 이곳에서 왕은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고 때로는 사신을 맞아 들이기도 하고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 1867년에 중건되었다.
▲ 근정전을 뒤에 두고 우리는 조정에 배치된 품계석에서 과거 과거시험을 보던 자리를 확인하면서 조선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었다.

근정전 앞의 조정은 박석을 깔아 반사되지 않게 배려했으며, 품계석의 벼슬들이 좌우로 도열하여 조선의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 근정전 내부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왕과 신하가 자리를 배치한 것이 인상이 깊다. 천장에는 7足의 용의 자웅이 포효하고 있었다. 7족룡은 황제의 상징이다. 고종때부터 중국의 황제의 위력이 약해지면서 우리 조선에서도 왕에서 황제로 된다.

상월대와 하월대 위로 건축한 아파트 5층 높이의 건물로 올라가는데에 답도를 오른다. 

▲ 근정전 상월대에는 엄청난 포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누구의 장난일까? 분명히 조선시대의 무기는 활화산에서 소총이었으니까 분명 조선이 아닌 때의 상처이다. 남-북전쟁시에 제공권을 가진 미군의 공군기가 조선의 국부가 있는 이곳을 공격한 것임을 알게 된다.

상월대에는 엄청난 포탄자국으로 남북전쟁에서 제공권을 갖은 미국의 전투기가 조선의 왕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 근정전을 포격한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조선의 황제의 집무실 근정전을 처참하게 때리다니! 일제 36년을 접고 미군정으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 근정문의 앞을 들어가고 나오는 관광객들이다. 관광객들중에는 한복을 입은 그것도 왕의 상징인 붉은 색의 황제의 옷을 입고 마음껏 뽑내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우리의 반쪽인 이북의 조선인민들은 보이지 않는다. 뒤편으로 근정전이 보이고 멀리 북악산이 보인다.

근정전을 나와서 우리는 한글을 창시한 집현전으로 접어든다. 지금은 수정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이 명칭은 고종 4년인 1867년에 중건하면서 새롭게 부여한 것이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이곳에서 정음청을 설치하고 세종28년인 1446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된다. 수양대군이 집정하면서 집현전은 폐지된다.

그러나 바로 앞에는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는데 영어 간판들이 이곳이 훈민정음의 산실이었음을 무색하게 한다.

▲ 한글을 만든 집현전에서 우리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앞에 관광객을 위한 음료매점이 있는데 영어로 표기가 된 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우리가 담넘어에 있는 삼청동의 식당을 찾기 위하여 돌면서 놀란 것은 우리 한글상호가 안보인다는 것이었다. 한글상호 음식점 "배꼽시게"음식점을 찾아 우리는 술을 곁들여 하나가 되었다.

수정전은 바로 뒤에 위치한 경회루로 인해서 작게 느껴지게 한다. 

경회루는 국보224호로 왕의 전용공간으로 경사가 있을 때 연회장소로 쓰여진 곳이다. 또한 외국 사신을 영접했던 곳으로. 그리고 과거 장원급제자 격려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의 뒷뜰이다. 미인의 눈섭이라는 '아미산'과 굴뚝이 선명하다. 왕비침소인 교태전이나 강녕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왜냐면 왕이 있는데 다시 왕의 상징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굴뚝은 6각으로 단청이 상하지 않도록 밖으로 돌렸음을 알게 된다. 궁중의 원예를 담당한 관원들이 철따라 대 맞추어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미었음을 알게 된다. 중국 관광객들은 경복궁을 둘러보면서 조선이 중국의 변방의 자기들 나라의 변방임을 알고 흐뭇해한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건순각이라는 왕비가 왕자를 낳는 방이 있다. 백두산에서 내려온 氣가 이곳 경복궁 뒤의 북악산에서 용트림을 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기운찬 왕자를 낳는 다는 풍수지리학적인 해석으로 일본 관광객들중에는 이 氣를 받는 관광단도 있음을 귀띔해준다.

왕비가 잠자는 교태전과 왕비의 마음을 달래주는 아미산과 굴뚝은 보물 811호로서 6각 굴뚝이 있어 유명한 곳인데 사람이 만든 인조동산으로 중국의 '아미산'을 원용한 것이다. 

교태전을 나오면 경복궁의 가장 아름다운 꽃인 향원지와 향원정이 나오는데 지금은 복구 공사중이어서 둘러보지 못하고 우리는 민속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향원정의 뒷편인 건청궁은 참으로 치가 떨리는 험한 일이 일어난 곳이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그것이다. 고종 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공사관 직원들과 깡패들을 동원하여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찾아 죽였다.

▲ 경복궁에서 경회루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향원지와 향원정이다. 향이 멀리까지 간다고 하여 향원정이다. 1867년 고종 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고종이 즐겨 지내던 곳으로 옛날 달력을 보면 이곳에서 유명한 여자 배우들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리고는 그 옆의 녹산으로 끌고가 석유를 끼얹어 태우고는 남은 뼈를 그 앞 연못 향원지에 던져버린다. 

▲ "백성들이여 깨어나라!"는 절규를 남기면서 명성황후는 일본의 저 깡패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어떤 이는 말한다. 대원군이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 최시형 장군을 만나 민중들의 한(恨)을 들어주었더라면 조선은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척양척왜의 동학이 지금은 친양친왜의 서학으로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프다!

"일본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일본의 우리 국모살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백성들이여 깨어나라. 나는 조선의 국모다!" 이 절규와 함께 명성황후는 운명하신다.

학생들에게 경복궁 해설사로 봉사하면서 나는 강조하였다. "지금 우리는 일본문화에 길들여져서 나도 모르게 일본 제품에 손과 발이 가는 현실이다. 일본제품 ADIDAS(아디다스), SK2, 토요타 등을 멀리하는 길이 극일하는 길이며 명성황후를 살리는 길이다"라고! 

고종 임금은 그 날 이후 경복궁 북쪽문인 신무문 가까이에 있는 집옥재에서 세자 순종과 기거하다가 다음 해인 고종 33년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우리는 이를 '아관파천'이라 기록하고 있다.

▲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이다. 고종은 건청궁에서의 후유증으로 지내야만 했다. 고종은 세자 순종과 기거하다가 다음해인 고종 33년인 1896년 2월 11일까지 약 5개월 가량을 두려움에 떨다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다음해인 1987년 2월 25일까지 왕과 세자는 이곳에서 기거하다가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기니 경복궁의 시대는 마감을 한다.

조선의 제1대 태조의 조선건국 1392년에서부터 27대 순종때의 일제의 국권창탈  191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반쪽인 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성들은 이곳을 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남 -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조선 이전의 고려의 법궁이 있는 개성을 가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누구인가? 동족을 향한 총칼을 들이대고 있는 지지리도 못난 민족이 되어버렸다. 이 총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남과 북의 두 지도자의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을 학수고대한다. 이미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은 서명하지 않았는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곧 시장기를 느끼면서 먹거리 상호를 찾는데 전부가 외래어 상호만의 홍수속에 우리들은 서있었다. 외래어 간판 가운데에서도 한복의 전문업체인 <질경이>를 찾아냈으나 너무 외롭게 보인다.

▲ 민속박물관을 거쳐 경복궁을 나오니 우리는 외래어 상호로의 삼청로에 내던져졌다. 멀리 한글상호의 <질경이>가 외래어 간판속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질경이와 그 한복 전문업체를 이끌고 있는 이기연 사장이 큰바위얼굴처럼 다가온다. 너무나 소중하게 와 닿는다!! (www.jilkyungyee.co.kr)

우리는 시장기를 느끼면서 먹거리 업체를 찾으니 민속박물관 근처에서 <큰기와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간장 백반에 술한잔에 막걸리를 시키니 송년의 장은 정말로 감격으로 와 닿는다.

▲ 어렵게 찾은 한글간판의 음식점을 찾으니 청주 한씨 양반가에서 전수되어 오던 음식을 재현해 선보이는 <큰기와집>이 있다. 인기메뉴는 "청주한씨 게장정식"이다.(전화 722-9024) 우리는 그곳에서 경복궁을 돌면서의 허기를 달랬다. 정말로 맛있었다. 앙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에서의 주인공 아멜선생님 처럼 큰기와집의 한영웅씨는 아멜선생으로 와 닿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먹거리는 '큰기와집'으로, 한복은 '질경이'로의 입소문으로 삼청동에서 한글 간판의 먹거리, 볼거리들이 외래어 상호를 압도하기를 기원해본다.

푸짐한 게장한식과 막걸리 한잔에 취해 우리는 인접한 민속박물관의 야외 셋트장을 둘러 나오면서 우리는 2018년 건강과 나라의 통일을 기원했다.

▲ 민속박물관 앞뜰에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 후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시절의 아린 세트장을 만들어 광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은하사진관, 약속다방, 만화방 등이 당시 영화포스터와 함께 그냥 가게 하지를 않았다. 외래어로 상호를 바꾸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마을공동체넷에서는 한글상호의 상단을 만들고 있는데 꼭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 우리는 나라의 조국통일과 각 개인의 건강을 장승과 돌탑에 기원하면서... 경복궁을 뒤로 하였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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