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600년의 한양 조선에 왔건만 인걸은 간데 없고...
학교 친구들이 송년회를 어디서 할까 궁리하다가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가자고 하는 의견일치로 우리는 지난 12월 7일 경복궁을 찾게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우리는 만났다.
경복궁 나들이의 동선을 우리 다섯사람이 나누어 준비하고 설명하면서 효율적인 경복궁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면서 전 충남대학교 최관삼 교수의 제언으로 오늘의 송년의 자리는 이렇게 이곳 경복궁 방문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의해 세워진 궁궐이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 화평전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며 태조 3년인 1394년 음력으로 10월 25일에 개성을 떠나 마침내 그달 28일 이곳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자문을 받아 경복궁을 세우고 조선을 유교적 이상국가로 세워 가기로 한다.
뒤로 높이 솟은 북악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거리가 시원스럽게 열려있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동서로 해태 두 마리가 마주 버티고 있었다.
궁성의 동남쪽과 서남쪽 양 모퉁이에 망루인 동십자각, 서십자각이 있고, 동서 북쪽으로 건춘문과 영추문 그리고 북쪽으로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청와대를 마주하게 된다.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들이 소실되었고 그후 창덕궁, 창경궁은 복구되었으나 경복궁은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가 1865년 고종2년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된다.
하지만 1895년 8월에 일본의 깡패들에 의해 우리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896년에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니 경복궁은 그 임무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궁궐은 훼손되어 지금은 약 30%만 남게 된다. 경복궁은 사적 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1에 위치하며 연 면적 약 127,000평(416,990평방미터에 이르며 궁궐내에 있는 근정전과 경회루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그들의 조선을 침략하면서 3.5도 남산의 신궁을 향하게 조선총독부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수모를 당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때 복원되면서 경복궁은 광화문부터 근정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한편 일제에 의해 조선총독부인 중앙청을 지으면서 경복궁이 크게 훼손된 것을 김영삼 대통령때 그 일제 잔재 조선총독부를 헐어버린다.
그 조선총독부의 파괴된 화강암의 돌들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송현동의 대한항공의 호텔을 짓기 위한 공터의 담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대한항공은 이전에 삼성에서 사들여서 호텔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바로 그 옆에 풍문여고와 덕성여중고가 담넘어에 있기때문에 짖지 못하다가 현재는 담보된 상태이다.
일제시대에는 경복궁을 헐고 그곳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그곳의 일본 요직의 간부들의 숙소를 이곳에서 36년간 그리고 일제가 나가면서 다시 미군정으로 주미대사관의 직원들이 이곳을 숙소로 사용하였다. 이 부지는 삼성에서 구입했다가 다시 대한항공의 부지로 매매된다. 일제때에는 일본의 최일류 부대의 군인들이 주변에 보초를 서다가 다시 미군의 최정예 해병대가 이곳의 사방에 보초를 서면서 이곳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나고 미군정이 되면서 송현동의 이 부지는 광화문의 미대사관의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용산으로 물러나면서 결국 삼성이 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 이곳은 해방되지 않은 공간이라고...
경복궁의 어디에도 우리의 반쪽인 북조선의 관광객은 없다. 어서 통일이 되어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저들은 이곳 조선 경복궁을 활보할 날이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중국의 신혼으로 보이는 남녀가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있다. 경복궁의 꽃 - 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로서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등의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많은 건물 중에서도 최고의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 고종4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곳 조정에서는 또한 과거시험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임금의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을 배경으로 삼았다.
근정전 앞의 조정은 박석을 깔아 반사되지 않게 배려했으며, 품계석의 벼슬들이 좌우로 도열하여 조선의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상월대와 하월대 위로 건축한 아파트 5층 높이의 건물로 올라가는데에 답도를 오른다.
상월대에는 엄청난 포탄자국으로 남북전쟁에서 제공권을 갖은 미국의 전투기가 조선의 왕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 근정전을 포격한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조선의 황제의 집무실 근정전을 처참하게 때리다니! 일제 36년을 접고 미군정으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근정전을 나와서 우리는 한글을 창시한 집현전으로 접어든다. 지금은 수정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이 명칭은 고종 4년인 1867년에 중건하면서 새롭게 부여한 것이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이곳에서 정음청을 설치하고 세종28년인 1446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된다. 수양대군이 집정하면서 집현전은 폐지된다.
그러나 바로 앞에는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는데 영어 간판들이 이곳이 훈민정음의 산실이었음을 무색하게 한다.
수정전은 바로 뒤에 위치한 경회루로 인해서 작게 느껴지게 한다.
경회루는 국보224호로 왕의 전용공간으로 경사가 있을 때 연회장소로 쓰여진 곳이다. 또한 외국 사신을 영접했던 곳으로. 그리고 과거 장원급제자 격려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왕비가 잠자는 교태전과 왕비의 마음을 달래주는 아미산과 굴뚝은 보물 811호로서 6각 굴뚝이 있어 유명한 곳인데 사람이 만든 인조동산으로 중국의 '아미산'을 원용한 것이다.
교태전을 나오면 경복궁의 가장 아름다운 꽃인 향원지와 향원정이 나오는데 지금은 복구 공사중이어서 둘러보지 못하고 우리는 민속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향원정의 뒷편인 건청궁은 참으로 치가 떨리는 험한 일이 일어난 곳이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그것이다. 고종 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공사관 직원들과 깡패들을 동원하여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찾아 죽였다.
그리고는 그 옆의 녹산으로 끌고가 석유를 끼얹어 태우고는 남은 뼈를 그 앞 연못 향원지에 던져버린다.
"일본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일본의 우리 국모살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백성들이여 깨어나라. 나는 조선의 국모다!" 이 절규와 함께 명성황후는 운명하신다.
학생들에게 경복궁 해설사로 봉사하면서 나는 강조하였다. "지금 우리는 일본문화에 길들여져서 나도 모르게 일본 제품에 손과 발이 가는 현실이다. 일본제품 ADIDAS(아디다스), SK2, 토요타 등을 멀리하는 길이 극일하는 길이며 명성황후를 살리는 길이다"라고!
고종 임금은 그 날 이후 경복궁 북쪽문인 신무문 가까이에 있는 집옥재에서 세자 순종과 기거하다가 다음 해인 고종 33년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우리는 이를 '아관파천'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제1대 태조의 조선건국 1392년에서부터 27대 순종때의 일제의 국권창탈 191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반쪽인 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성들은 이곳을 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남 -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조선 이전의 고려의 법궁이 있는 개성을 가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누구인가? 동족을 향한 총칼을 들이대고 있는 지지리도 못난 민족이 되어버렸다. 이 총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남과 북의 두 지도자의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을 학수고대한다. 이미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은 서명하지 않았는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곧 시장기를 느끼면서 먹거리 상호를 찾는데 전부가 외래어 상호만의 홍수속에 우리들은 서있었다. 외래어 간판 가운데에서도 한복의 전문업체인 <질경이>를 찾아냈으나 너무 외롭게 보인다.
우리는 시장기를 느끼면서 먹거리 업체를 찾으니 민속박물관 근처에서 <큰기와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간장 백반에 술한잔에 막걸리를 시키니 송년의 장은 정말로 감격으로 와 닿는다.
푸짐한 게장한식과 막걸리 한잔에 취해 우리는 인접한 민속박물관의 야외 셋트장을 둘러 나오면서 우리는 2018년 건강과 나라의 통일을 기원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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