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에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자 여론은 술렁였다. 도 의원이 유사역사학을 추종해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을 중단시킨 것 아니냐는 거다. 이 와중에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의 글 ‘만리재에서-국뽕 3각연대’는 주주통신원 사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류사학계의 주장을 기정사실화 하는 부분이었다. 이후 주주통신원 온라인 커뮤니티(카카오톡) 방에서는 이 분야에 나름 이해가 있거나 관심 있는 분들 사이에 논쟁이 이어졌고 그 중 몇 분이 주도하여 임시 팀인 ‘고대사연구팀’을 꾸렸다. 그들은 고등학교 한문 교사를 지냈고 대만에서 중국 고대문학을 석사 전공한 김종선 주주통신원, 김진희 공인노무사, 김진표 한겨레주주통신원회 전국위원장, 고대사 연구 모임에 참여하는 등 관심 큰 이재준, 김상진, 이대원 주주통신원이다.
이들은 7월부터 11월말까지 총 5개월 간 수시 온라인 소통과 아홉 차례의 연구 모임을 가졌다. 고대사 관련 학자들의 주장을 비교 검토하고 쟁점사항들을 정리했다. 이번 고대사 연구 모임을 주도한 김진희 주주통신원은 “우리가 역사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니 나름 결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연구팀의 결론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역사를 대하는 이들에게 풍부한 사유를 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중요하고 첨예한 역사 논쟁에서 주주통신원들이 그냥 수동적인 독자 또는 관전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학자들의 논쟁과는 별개로 시민의 눈과 눈높이에서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한겨레:온> 창간 3년을 맞아 주주통신원들도 이제는 단순한 기사 쓰기 차원을 넘어 학술 연구 활동을 통해 콘텐츠의 질과 참여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번 연구가 첫 사례다”라는 말로 의미를 부여했다. 연구팀의 결과는 '[시리즈Ⅰ] 국뽕 3각연대, 진실은 이렇다'를 시작으로 모두 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1. 고조선 논쟁 왜 뛰어들게 되었나?

지난 6월이었다. 어느 주말 아침 한겨레 주주통신원 톡(카카오톡) 방에 올라온 기사 한편(길윤형 편집장 「국뽕 3각 연대」 /한겨레 21-제1167호)이 느긋한 휴일 아침을 깨웠다. 고조선 위치와 영역에 관련한 간결하고 단호하면서도 응축된 논조의 기사가 온종일 톡방을 논쟁으로 달군 것이다.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부분은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요동 지방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지금까지 북한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2600기의 낙랑 고분이 확인됩니다.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합니다.”라는 한사군 위치와 관련한 길윤형 편집장의 주장이었다.

[관련기사 보기] http://h21.hani.co.kr/arti/reader/together/43714.html

고대사 논쟁은 역사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오랜 논쟁거리였고 주류 역사학계(특히 젊은 역사학자들 모임)와 재야사학 간의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물론 그들은 역사 논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학문적 논쟁이기보다 진영논리나 방어논리에 가깝다. 문제는 이런 진영논리가 순수한 학문적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주류 고대사학계는 재야사학 등을 향해 근대국가의 산물인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며 비판하고 있다. 반면 이덕일 등 재야사학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식민사학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며 주류 고대사학계를 비판한다. 이런 논리는 서로 상대방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역사 연구는 철저한 고증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서는 안된다는 주장(주류 사학계가 재야사학 또는 비주류 학계를 향해)과 기존의 통설에 얽매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편협한 시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주장(윤내현 등 비주류 학계가 주류 학계를 향해)하는 양측이 서로 상대를 바라보는 기본 프레임이다.

여기에 평양에서 발견된 유물 고증에 대한 신뢰 여부와 함께 남북한 학자들 간 연구실적에 대한 해석, 정치적 상황 등이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학문적 접근 자체보다는 아전인수식의 상대방 공격성 비판으로까지 변질되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처럼 학계에서조차 그들의 긴 논쟁만큼의 새로운 고증 및 연구 실적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채 일반에까지 논쟁 대립으로 격화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우리 통신원들이 연구 조사를 통해 fact check도 하고 나름대로의 결론도 내보자는 취지로 연구팀이 출발하게 되었다.

2. 고대사 논쟁의 핵심은 고조선 위치

고대사에 대한 논쟁은 고조선 위치 외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근대사 이전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는 일제 강점기 당시 근대적 방식의 역사 연구는 물론 역사학을 전문으로 하는 역사학자가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조직적 역사 왜곡과 함께 오랜 기간 친일 역사학자들의 역사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오랜 현실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직접 체험했던 가까운 근현대사와 달리, 오래된 기록과 오래된 문자(고서) 및 유물에 의존해 고증을 거쳐야 하는 고대사였음에도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되지 못한 채 상당한 기간, 상당한 부분이 일본과 친일 역사학자들이 정리한 자료와 연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논쟁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가 개정될 때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특히 고대사) 논쟁은 계속되어 왔고 그 한가운데 주류 고대사학계와 재야 사학계가 있다.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역사학자로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논쟁도 포함하고 있는 이들 논쟁의 히스토리를 들여다보니 복잡하게 얽혀있는 고대사 논쟁의 실타래도 보였다.

대립되고 있는 논쟁 중 역시 길윤형 편집장이 언급했던 고조선 영토 문제, 즉 고조선의 영역에 설치했던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이 한반도 내(평양 등)에 있었는지, 한반도 밖 만주 어느 지역(요동, 요서 등)에 있었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물론 재야 사학계 외에도 윤내현을 비롯한 학자들 역시 한반도 밖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폐기와 관련한 독도 표기 문제와 함께 역사지도사업의 폐기가 정당한 것이었는지(진영논리로 폐기된 것은 아닌지)도 주요 쟁점이었다. 이런 상황들을 알기 쉽게 정리해가면서 진짜 고대사 논쟁의 핵심 문제를 풀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3. 발견된 쟁점과 시사점은?

연구팀은 주요 쟁점 사항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4가지 과정을 정리했다. 첫째 고대사 논쟁의 오랜 히스토리의 정리, 둘째 고대사 논쟁에 대한 학자들 주장(학파간 주장이라고 칭하자)의 모순점 정리, 셋째 길윤형 편집장의 고조선 위치 주장의 수용 여부와 고대사 논쟁으로 비화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의 정당성 여부, 넷째 이번 논쟁의 핵심이었던 고조선 위치 비정에 대한 학파별 주장의 구체적 근거를 비교․정리했다.

첫 번째 과정인 고대사 논쟁의 오랜 히스토리에 대한 정리는 고대사의 쟁점 정리에 앞서 ①고대사논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②전후 사실관계와 맥락이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 ③그들 간 주장에는 어떤 모순이 발견되는지를 먼저 이해하기 위해서다. 상반된 주장의 학자들 간 고대사 논쟁에는 순수한 학문적 견해 외에도 역사 연구의 접근법과 관점에 대한 논쟁도 치열하기 때문에 먼저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둘째 학자들 간 주장(학파들 주장이라고 칭하자)에 어떤 모순점이 발견되는지 전반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고대사 논쟁에서 일반인인 우리가 학자들의 주장 근거를 직접 고증하고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 주장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는 판단할 수 있었고 실제 그런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국정화 교과서와 관련해서 주류 역사학계와 재야사학간 주장, 역사잡지인 역사비평의 행태, 동북아역사재단 사업 폐기와 고대한국 프로젝트 지원 중단,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 등 쟁점 사항별로 학자들간(주류, 비주류, 재야 등) 주장 내용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주장 내용의 모순점 또는 의문점들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고 이는 학자들간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셋째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이 주장한 ‘①2600기 낙랑고분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입증하며,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사학자들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한다는 주장과 ②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에 대한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이다. 학자들간 주장이 대립되는 고조선 위치 비정에 대한 부분은 이번 연구의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학자들 간 주장을 비교 검토하여 그의 주장이 논리적․사실적 측면에서 타당한 것인지(또는 수용할 수 있는 것인지)를 판단했다.

학자들의 낙랑군 위치에 대한 주장의 근거는 대개 발견된 유물들을 근거로 하는 고증과 관련 역사 사료를 근거로 한 고증을 기반으로 한다. 유물 고증과 관련해서는 봉니(封泥), 초원 4년(기원전 45년) 현별 ‘호구부’, 낙랑목간, 중국식 고분인 (제1호분)에서 나온 화폐인 화천(貨泉), 벽돌무덤의 경우 전조 방식, 봉니와 함께 출토된 기와 등 평양에서 고분과 함께 발견된 유물들이다. 사료의 고증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 산해경, 제왕운기, 고려사, 사기, 상서대전, 관자 등 고서들에 언급된 고조선 관련 내용들이다.

유물과 사료의 내용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살펴본 결과 학자들 간 주장과 근거가 각각 달랐고 각각 자신들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부분을 주로 인용하는 방식이다 보니 명쾌한 결론을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고조선 위치에 대한 길윤형 편집장의 단호한 주장은 역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또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과 관련해서도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길윤형 편집장의 글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들게 했다는 중론을 반영하여 그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논란의 여지없는 명확한 사실에 어떠한 이의도 있을 수 없다는 듯한 단호함’의 전반적인 문맥과 맥락을 짚어보았다.

비역사학자인 우리 연구팀이 이번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부딪친 한계도 많았다. 역사학적 고증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제대로 된 고증인지, 어떤 고증자료를 신뢰해야 하는 것인지, 학자별 다른 주장을 어떤 기준으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지 등 학문적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선 학자들 간 주장을 드러난 사실들 위주로 비교해보는 방식으로 우리 나름의 체계를 잡아갔다. 그들 주장이 고증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증에 대한 정확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주장 과정에서의 논리적 오류나 사실관계가 분명한 부분은 짚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에 의한 판단이 사실에 제대로 접근하려는 우리의 목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그들이 의도한 바와 달리 이해되는 부분이 발견되더라도 그들이 언급하고 주장했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비교분석한 것이니 우리의 치명적 실수가 아닌 한 서술자인 그들의 몫이고 그들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의 결과물은 세 번으로 나누어 발표하려고 한다. 이번 [시리즈Ⅰ]에 언급할 부분은 첫 번째 과정인 고대사 논쟁의 히스토리 부분과 세 번째 과정인 길윤형 편집장의 주장과 관련한 고조선 비정 주장과 고대사 논쟁으로 비화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이다. 이후 [시리즈Ⅱ]에서 두 번째 과정인 고대사 논쟁에 대한 학자들 주장(학파별 주장이라고 칭하자)에 어떤 모순점이 발견되는지 전반적 주장을 비교 정리하게 될 것이며, [시리즈Ⅲ]에서는 이번 논쟁의 핵심이었던 고조선 위치 비정에 대한 학파별 주장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면서 드러났던 쟁점을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 과정인 고대사 논쟁의 히스토리를 들여다보자.

1. 역사논쟁은 왜 시작되었나

일제 식민지를 겪어 온 우리는 식민지 기간은 물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 일본과 친일 인사들에 대해 줄곧 경계를 해 왔다. 우리가 직접 체험했던 가까운 근현대사와 달리, 오래된 기록과 유물 및 오래된 문자(고서)에 의존해 고증해가야 하는 고대사에 관한한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되지 못한 채 상당한 기간, 상당한 부분이 일본과 친일 역사학자들이 정리한 역사서에 의존해야 했다.

이런 연유로 역사 교과서가 개정될 때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특히 고대사) 논쟁은 지속되어 왔고 그 한가운데 주류 고대사학계와 재야 사학계가 있었다. 여러 논쟁 사항들이 있지만, 역시 길윤형 편집장이 주장했던 고조선 영토 문제, 즉 고조선이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한반도 밖 만주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물론 고조선 강역, 비정 문제에 있어서는 재야 사학계 외에도 강단사학의 일부인 윤내현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 역시 한반도 밖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대별 갈등 상황([별표]역사 논쟁의 과정 요약)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78년 재야 사학자들은 원로사학자 이병도, 신석호가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친일파로 이들에 의해 형성된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국사 교과서 또한 식민사관에 의해 쓰인 것이라며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시정 건의한다. 이어 행정소송, 국회 청원과 대중강연을 통해 고조선 위치 등 고대사 문제를 이슈화하였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라는 주제로 고조선의 영토문제 등을 주제로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는데 고대사 부문인 고조선과 한군현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에 대해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재야 사학계가 민족의 주체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역사교과서를 개정하려 했다며 반발했고 이후 고대사 논쟁은 지속되어 오고 있다.

이런 논란 속에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 문제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15년 국회에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가 구성된다.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되고 재단의 사업으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이 사업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업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2016~2017 사이 주류 고대사학계는 <역사비평> 4개호 연속 10편 이상의 고대사 논문을 게재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발표하였고, 재야 사학계 때문에 자신들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이 폐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전후 사실관계와 맥락은 무엇인가

위 갈등상황의 구체적 사실관계와 맥락은 무엇인가. 주류 역사학자들이나 젊은 역사학자들이 고조선 위치에 대한 주장을 할 때는 항상 재야 사학자들의 그릇된 역사관을 문제 삼고 있으며 그들 주장이 그릇된 역사관에 기반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고조선 위치를 한반도 밖에서 찾으려는 것은 역사관의 뿌리가 일제 강점기 일제와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했던 식민주의 사관과 닮아있으며 이는 영토에 집착하는 비합리적 행위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재야사학자들이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언론, 정치인들의 동조를 이끌어내어 역사교과서를 수차례 그릇된 방향으로 개정했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추진해온 사업까지 저지해왔으며 결국 사업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재야사학자들은 주류 고대사학계가 식민사관에 젖어 그릇된 역사관을 고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병도가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전력과 그 아래서 배운 그의 제자들이 이병도의 고조선 한반도설을 유지하기 위한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이다. 주류 역사학계가 이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오랜 그들의 주장이 무너지면 그들의 밥그릇도 함께 위험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기자신고>를 발표했던 윤내현은 이를 근거로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 등 고대사 구조의 전개에 관해 미궁에 빠져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후 <중국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을 발표하면서 한국 사학계에 상당히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발이 활용한 사료나 논리 전개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종래의 통설이 자신의 견해보다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제시한 것이라면 마땅히 학문적 차원에서 수렴되어야 하나, 통설에 대한 선입관이나 통설을 지지해왔던 학자들이 누리고 있는 권위의 영향 때문이라면 학자적인 양식으로 단호히 배제되어야 한다며 역사학계의 풍토와 학문적 접근 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3. 그들의 주장에는 어떤 모순이 발견되는가

위 학파간 갈등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 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발견되었다. 즉 재야 사학의 친일, 친독재 전력을 문제 삼고 있는 주류 고대사학계의 주장,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 즈음 <역사비평>에 주류 고대사학계의 엄청난 분량의 고대사 관련 논문(근현대사 논문이 아닌) 발표. 하버드대 마크 바잉턴 교수의 연구 중단 관련, 주류 고대사학계의 재야사학에 대한 영토 집착 행위라는 비판,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 등에서 많은 의문점들이 발견되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리즈Ⅱ]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하기로 한다.

 

이제 우리의 논쟁이 촉발되었던 위 「한겨레 21」 주장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자.

1. 한사군 위치 관련 주장

한사군 위치와 관련해서 길윤형 편집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요동 지방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지금까지 북한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2600기의 낙랑 고분이 확인됩니다.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합니다. 이것이 ‘일군의 학자’들 눈에는 견디기 힘든 ‘식민사학’의 잔재로 비친 것이지요.”

이 주장과 관련해 우리가 확인해야 할 사항은 “① 2600기 낙랑고분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입증한다는 그의 주장, ②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사학자들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한다는 주장” 두 가지이다. 물론 규명이 쉽지 않은 사항이다. 그러나 주류 고대사학계가 이와 같이 주장하는 근거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비교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길윤형 편집장의 단정적인 주장에 문제점이 있지는 않은지 간단하게 짚어보기로 하고 유물과 사료에 대한 고증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리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로 한다.

(1) 2600기 낙랑고분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입증한다는 그의 주장

주류 고대사학계는 2600기 고분과 유물이 낙랑군 유적임이 사실상 확인된 것으로 더 이상 논쟁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발굴된 무덤들과 유적들에 대한 진위 여부와 제작 연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논란 속에서 고조선 위치가 사실상 확정된 것이라는 듯한 그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낙랑군의 위치를 입증할 고대 유물 대부분은 고증 과정에서 학자들 간에 해석상 이견이 있어 왔다. 봉니(封泥), 초원 4년(기원전 45년) 현별 ‘호구부’, 낙랑목간, 중국식 고분인 (제1호분)에서 나온 화폐인 화천(貨泉), 벽돌무덤의 경우 전조 방식, 봉니와 함께 출토된 기와 등 평양에서 고분과 함께 발견된 유물들이 한사군 평양설임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먼저 문서류 또는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인 ‘봉니(封泥)’의 경우 자유로이 휴대하고 이동이 가능한 휴대품이므로 발견된 곳이 곧 발원지라 확신하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일부 위조일 가능성이 제기되는가 하면, 진품일 경우라도 후대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자세한 주장은 후속편에서).

주류 고대사학계가 고조선 평양설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는 초원 4년(기원전 45년) 현별 ‘호구부’ 역시 행정양식으로서 일정한 양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크기가 각기 다른 점, 품질, 재료, 재질에서 그 진위가 의심되는 등 공문서라고 보기엔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양식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현재는 그 호구부에 대한 고증이 더 이상 어려운 상태이기도 하다.

최근에 발견된 일명 ‘낙랑목간’ 역시 문장의 구조상 진위도 의심되지만 국가의 인구통계문서가 일반 민간인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되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이보다 훨씬 더 큰 무덤에서는 이런 국가문서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엉뚱하게 규모가 작은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한군현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자료 비교<낙랑군을 중심으로> 복기대, 2016년 3월 상고사 토론회 발표문).

중국식 고분인 (제1호분)에서 나온 화폐인 화천(貨泉) 역시 중국 신나라 왕망 때 주조된 화폐로서 고분의 조성 연대가 왕망시대(서기 7∼23)의 것으로 확인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토성에서 봉니와 함께 출토된 기와의 경우 명문(銘文)에 보이는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는 연호는 서진 惠帝時代 연호(서기 291년부터 서기299년까지)로서 드러난 연호가 고조선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윤내현)도 있다.

이렇듯 유물들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마당에 이 고분들과 유물들이 한사군 한반도설임을 입증한다는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심지어 반대 주장(재야 사학계의 세련되지 못한 주장은 논외)에 대해 민족주의니, 반도사관이니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비판의 계몽주의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2)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사학자들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한다는 주장

옛 사서의 기록과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사학자들 대부분이 낙랑군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분명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낙랑군이 명확히 한반도에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는 주장과 오히려 요동 등 한반도 밖에 있다는 사서가 많고 전승된 사료가 다양하다는 주장이 주류 고대사학계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립적 주장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관련된 1차 사료가 거의 없고 대다수 사료들의 연대가 당대로부터 먼 사료들이며 그 마저도 사료마다 직접적인 기술이 아닌 간접 기술로 일부 언급되거나 주석으로 인용하는 등 대부분이 명확한 사료로서 바로 인용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때문에 혼돈된 사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가부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그 전승들 중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거나 교정해 나가야 한다(윤내현)며 한사군의 위치를 고증하기 위한 방법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료 연구가 계속되는 상태에서 타 학설을 무조건 배제한 채 다수설만을 더 이상의 논의가 불필요한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끝없이 진실과 사실을 탐구해야 하는 학자로서 바람직한 자세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역사학계의 다양한 주장이 아직 완벽히 반박되고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길윤형 편집장의 단정적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역사학자들의 고서의 인용 내용들에 대한 상반된 또는 각기 다른 해석 부분에 대해서는 [시리즈Ⅲ]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2.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

다음으로 그는 “ ~ 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신성불가침의 ‘국뽕 3각연대’가 완성됩니다. 이들은 2008년부터 진행되던 ‘동북아역사지도’사업을 폐기했습니다. 이 사업에 참여한 학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주장과 관련해서 우리는 “① 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사업 목적에 부합한 것이었을까?, ②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 참여한 학자들은 왜 억울해 하는 것이며 이유는 합당한 것일까? ③ 그들은 억울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부분을 정리해 보았다.

(1) 동북아역사지도는 사업 목적에 부합한 결과였을까?

먼저 동북아역사재단 사업 중 하나인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 대한 학계의 주장이 다르다. 재야사학, 근대사학자 박용규(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신운용(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및 김상태(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 저자) 등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응하는 사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주류 고대사학계 및 젊은 역사학자들은 동북아 역사지도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사업이라고 말한다. 누구 주장이 맞는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살펴보았다.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종합적인 연구·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개발을 수행함으로써 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및 번영의 기반을 마련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5조(사업) ①재단은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사업을 행한다.

1. 동북아시아의 역사정립을 위한 조사·연구

2.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조사·연구

3.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전략·정책대안의 개발 및 대정부 정책건의

4.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지원·교류

5.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홍보·교육·출판 및 보급

6. 동해·독도의 표기 관련 체계적 오류시정활동

②재단은 교육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제1항의 사업 외에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

 

위 관련 법률에 의하면 동북아역사재단의 사업은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관련 사업이 주된 목적임을 명시하고 있으므로 동북아역사재단의 사업 중 하나인 동북아지도사업 역시 그 법률 목적에 부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된 동북아역사지도가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사업) 목적에 맞는 지도였는가에 대한 판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제1조(목적)에서 ‘동북아시아의 역사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종합적인 연구·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개발을 수행함으로써~’ 라는 법률 근거와 제4조(사업) 제①항의 제1호~제6호에 의해 판단해 보건대 재야사학, 근대사학자 박용규, 신운용 및 김상태 주장이 사업 목적에 부합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류 역사학계의 ‘동북아역사지도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사업’이라는 막연한 주장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결국 동북아역사재단이 동북아역사지도가 사업목적에 부합하였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여 사업의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2)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 참여한 학자들이 억울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회의 ‘동북아 역사왜곡대책 특별위원회’가 7년에 걸쳐 세금 47억이 들어간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 대해 검증했는데 두 개의 중대한 문제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네 개의 한사군 중에서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그려 넣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고유 영토로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독도’ 표기를 누락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재심사 결과에서도 44점(최초 심사에서는 14점, 100점 기준)을 받고 10억 원 이상의 연구비가 회수되었다.

동북아 역사재단이 연구팀에 통보한 심사 보고서를 보면 지도학적 요건(19개), 국가정체성(4개), 외교적 측면(2개) 등 세 가지가 제시되었는데, 국가정체성 항목에 ‘대한민국의 위치, 크기, 형태 등이 부적절’ ‘모든 지명은 한글로 표기되어야 하나 표기되지 않았음’ ‘독도는 반드시 표기되어야 하나 표기되지 않았음’ ‘동해 명칭이 명확히 표기되어야 하나 표기되지 않았음’ 등의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이에 대해 주류 역사학자들은 동북아특위 국회의원들이 지도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판단하며 집착한 시기는 대개 한 시점으로 수렴되는, 즉 고조선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인 ‘한사군’ 설치시기라며 이는 유사역사 쪽에서 낙랑군이 중국 요령성 지역에 있다고 주장할 때 쓰는 대표적 사료로서, (이러한) 유사역사 편향은 도종환 의원만의 문제가 아닌 여야 구분 없이 대다수 의원들에게서 관찰된다고 주장한다(한겨레21, 제1167호).

이 논쟁에서 도종환 의원을 비롯한 정치권이 재야사학계에 기울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주류 역사학계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는 논외로 한다. 왜냐하면 그 역사지도 사업이 사업 목적에 맞게 제대로 진행된 것인지, 그래서 그들 주류 사학계가 억울해하는 이유가 합당한 것인지를 판단해야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단 위 (1)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은 지도를 제대로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근 중국, 일본 등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법률에서도 명시했듯이, 특히 독도 문제)에 맞추어졌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독도 표기 누락 여부, 한글 표기 미비 여부, 동해 명칭 오류 여부의 기준 자체는 역사지도 사업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완성도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했다고 생각되었다.

(3) 그들은 억울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주류 사학계가 주장하듯 지도의 전반적인 기능적 측면(이 역시 사실 관계를 따져보아야 할 일이지만)은 그들이 이룬 하나의 성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북아역사재단은 관련법령에 따라 설립된 재단이며 관련 사업 역시 법령 근거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업 운영의 중요한 근거는 그 지도가 사업 목적에 부합한 것이었는지, 즉 사업 목적에 맞는 정확성일 것이다. 특히 관련 법령의 사업목적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역사문제, 독도문제, 동해․독도 표기문제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학자(동북아 역사재단에 참여한)의 연구 활동이 지도 만드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며 그들의 역사지도 연구 실적이 얼마나 풍부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사업 목적의 적합성이 충족된 이후에나 논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주류 역사학계에서 억울하다면서 줄곧 주장하는 것은 “시기와 축적, 영역을 달리해 자유자재로 출력될 수 있는 동북아역사지도의 ‘빅데이터적’ 성과”를 왜 무시하냐면서 이 방대한 역사지도 사업을 평가절하하고 있다는 것이다(한겨레21-1167호, 권력과 사이비 역사가 쓴 ‘고대사 침탈사’). 그러나 정작 그 역사지도 편찬사업이 사업목적 기준에 부합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다. 주류 사학계가 동북아역사재단의 사업 목적 (제1조) ‘동북아시아의 역사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종합적인 연구·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개발을 수행함으로써’의 의미와 (제4조)에서 내내 언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사항과 ‘동해·독도의 표기 관련 체계적 오류시정활동’이라는 사업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더구나 그들은 “낙랑군 비정 문제로 사업이 좌초된 것에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우리의 방대한 DB에서 낭랑군 위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채 1%도 되지 않는다.” 라고 다소 어이없는 주장을 한다. 고대사의 중요한 지점인 고조선 강역 문제가 그에겐 하나의 작은 사건일 뿐이었던 것일까? 진정한 학문적 업적이란 무의미한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결과여야 한다. 온 국민의 관심사인 고조선 위치 논쟁보다 시대별 영역을 세계인에게 편리하게 보여주는 스킬이 더 중요했다는 것인지 그들 인식에 우려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 전체에서 오는 느낌과 맥락을 살펴보았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무엇보다 객관자적인 입장에서 불편부당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영토쟁탈전이 극심했던 근대 국가 이후 팽배했던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에 대한 경각심에서 출발했을 것이란 점도 이해하고 싶다. 역사 연구가 순수하게 사실을 고증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해당사자들의 합리화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하자는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고자 했던 그 기준이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측면에서 중립을 벗어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첫째, 그는 아베신조의 역사관(침략에 대한)과 그가 말하는 ‘일군의 학자’들의 역사관을 동일선상의 역사인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역사관, 역사인식을 말하기 전에 주류 역사학자들은 일군의 학자(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윤내현과 최근 낙랑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들)의 학문적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논문으로 반론하거나 대응한 적이 있었는가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순서였다. 주류 사학계가 재야사학계 주장을 비학문적 방식으로 비판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일군의 학자’라고 칭한 학자들을 아베신조의 역사관과 동일선상에 놓고 있는 마당에 이들 역시 비학문적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말하는 일군의 학자가 우리가 모르는, 정말 문제가 있는 학자였다 하더라도 그가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결국 대고조선론(고조선이 한반도 밖이라는 주장)의 학자들 전반을 향하고 있으므로 먼저 대고조선론의 대표학자인 윤내현 학설을 부정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가 말하는 ‘일군의 학자’라면 역사학자가 아닌 재야사학자들은 아닐 것이니 아마도 주류 역사학계와 다른 학설의 윤내현을 비롯한 학자들을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길 편집장은 그 학자들을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느 학문 분야이든 명확한 실증이 어려운 경우 흔히 다수설, 소수설 등이 등장한다. 그는 그런 학문적 경향을 무시한 채 주류 고대사학계의 주장이 100%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사학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학설을(소수설이라고 해도) 학자가 아닌 사람들(재야 연구자들)에게 경도되었다는 표현으로 상대방 학자(군)를 폄훼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다수설이든 소수설이든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경도되었다는 것인가. 설령 그들의 논문에서 반론의 여지가 다수 발견되었다 해도 논리적 근거로 반박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학자가 내놓은 학설에 대해 학자가 아닌 ‘민간인 연구자’에게 ‘경도된 것’이라고 깎아 내리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셋째, 아베정권의 역사왜곡에 맞서야 할 특위는 ‘뜬금없이’ ‘고대사 논쟁’을 시작한다면서 ‘이들이 집착한 문제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의 위치 비정’이라고 말한다. 즉 그에게 고대사 논쟁은 ‘뜬금없었던 것’이고, 낙랑군 위치 비정 문제는 ‘집착’일 뿐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집요한 역사왜곡을 시도했던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 역사왜곡이 근현대사였겠는가. 다름 아닌 우리의 고대 역사를 뿌리조차 흔들려는 시도였다. 그 고대사를 다시 재조명하여 왜곡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겠다는 노력을 집착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인지 단언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그렇더라도 주장이 다르다 해서 상대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려는 표현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순수 과학의 분야와 달리 완전한 입증이 어려운 분야이고 다양한 학설이 존재할 수 있는 분야이다. 더구나 우리의 고대역사는 중국 대륙에 걸쳐 유물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국내 학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적 한계까지 안고 있다. 또한 고대 문자를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의 역사학자가 많지 않다보니 그 어려움은 더하다. 따라서 아직 드러나지 못한 부분을 염두에 둔 새로운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이는 진정한 가치를 지향해가는 학자들이 최소한 가져야할 자세라고 생각된다. 쇼비니즘을 걱정하는 길윤형 편집장이야말로 이러한 엄연한 다양성을 무시한 채 또 다른 맹목적 의식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뽕 3각연대’가 완성되고 이들이 동북아 역사지도사업을 폐기했다고. 그러나 길윤형 편집장에게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이들이 연대해서 동북아 역사지도사업을 폐기한 것이 아니고 잘못된 역사지도 사업이어서 폐기된 것은 아닌가를. 자신들 연구 실적이 폐기된 것을 억울해하기 전에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목적을 훼손하지는 않았는가를.

관련기사 (국뽕 3각연대, 한겨레21-1167호) :

http://h21.hani.co.kr/arti/reader/together/43714.html

고대사 연구 참여자 : 김종선, 김진희, 이재준, 김진표, 김상진, 이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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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표 ] 역사 논쟁의 과정 요약

1978

 

 

 

 

 

 

 

 

 

 

 

원로사학자 이병도, 신석호가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것은 친일행위이며 한편 이들에 의해 형성된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국사 교과서 또한 식민사관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시정 건의

<주요 내용은 총 8가지>

1. 고조선의 영역은 동북으로 바다까지, 북으로 헤이룽강까지, 서남쪽은 베이징까지이다.

2. 단군시대의 1,200년 역사를 삭제하였다.

3. 단군을 신화로 돌려 부정하고 있다.

4. 연나라 사람 위만을 고조선의 창건주로 삼았다.

5. 위만조선의 서울인 왕검성은 중국의 산하이관 부근에 있었다.

6. 낙랑은 중국의 베이징 지방에 있었다.

7. 백제가 400여 년간 중국의 중남부를 지배했다.

8. 신라 통일 후 68년간의 영토는 지린에서 베이징까지였다.

1978

 

 

 

<행정소송을 벌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재야사학 측 국사교과서에 대한 문제제기>

이후로도 국회 청원, 대중강연 등을 통해 강화되어가는 양상. 이슈화와 이를 통한 대중적 지지의 확보는 교과서 개정 자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침.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언급되는 것은 ‘민족’

1980

 

제4차 교육과정 개정 작업이 시작되자 재야 사학자들은 교과서 개정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 시작(학생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와 책자 보급)

1981

 

 

 

 

 

 

 

국회에 ‘국사 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 제출(1978 대통령에 건의했던 내용과 비슷) / 11.26~27 공청회(주요 쟁점: 단군, 기자의 실존 문제, 고조선의 강역 문제, 한사군의 존재와 위치문제, 신라의 강역 문제, 백제의 중국 지배문제 등 양측 공방) / 언론에서는 기존 학계의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 있다고 판단,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민정서는 사이비역사학 측 주장에 많은 공감대 형성한 것으로 보임 / 결과적으로 공청회 이후 국사 교과서에는 일부이긴 하나 재야사학 측 주장이 반영되어 서술. 재야사학 측 청원과 공청회 개최는 4차 교육과정 개편 과정중의 일로 공청회가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사항인 만큼 공청회에서 다뤄진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임.

1986

 

 

 

 

<조선일보> 광복 41주년 특별기획으로 게재한 <우리역사 점검>중 8.15 1면 기사 ‘국사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는 국사교과서 문제를 다시 촉발. ‘일본의 역사왜곡 이길 고대사교육 회복 시급’,‘삼국 건국연대, 시조 등 증발’과 같은 표제 아래 재야사학 측 주장 내용이 주를 이룸. / 기사 나간 뒤 교육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국사편찬심의회를 구성하고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 만듦.

1987.2.25

~26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라는 주제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고조선의 영토문제 등을 주제로 대규모 학술회의 개최 / 이 과정을 통해 확정된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은 고대사 부문 17개항, 중․근세사 부문 7개항, 근․현대사 부문 6개항, 일반․역사교육 부문 4개항으로 구성 / 특히 고대사 부문 17개항 중 5개항이 고조선과 한군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 이외에도 ‘~~민족 주체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는 서술을 하고자 했음.

2000.10.17

KBS-TV '역사스페셜‘ 윤내현 이론에 근거한 ’비밀의 왕국, 고조선‘ 방영

2015. 4.17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

동북아역사지도 연구책임자인 임기완(서울교대 역사교육)과 이덕일을 출석시켜 문답 진행/ 국회의원들은 이덕일 측에 호의적 태도,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은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이덕일 측의 주장을 보도

2015

김정배 국정화 교과서 프로젝트 총책

2015.11.16

 

<국회의원회관에서 중대 토론회 / ‘한국 상고사-한군현 및 태수 위치비정에 관한 논의>

참석자 : 소고선론자(공석구 교수, 윤용구 박사), 대고조선론자(복기대 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 / 공석수(태강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관련), 윤용구(낙랑군 유적 봉니 관련)

2016.3.22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제1회 상고사 토론회>

복기대, 막성용(군사문제 전문가) 조범종, 정성인(주류 고대사학자 및 고고학자)

2016~2017

<역사비평> 4개호 연속 10편 이상 고대사 논문 발표(주류 고대사학계) / 동북아역사지도 페기 시기 전후

2016. 6.26

 

 

 

 

강단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역사학에 젖어있다고 비판해온 재야 단체들이 모여 대규모 협의체 결성 / 식민사학 규탄대회와 함께 개최된 발대식에서 이 협의체 상임대표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우리 역사를 우리 관점에서 바라보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아직 광복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일제 조선총독부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예의 역사학인 식민사학이 여전히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라며 식민주의 역사학을 해체하고 바른 역사를 세우고자 하는 취지를 밝힘.

※ 논쟁 내용을 상황만을 중심으로 중립적 관점으로 재구성함.

편집: 이동구 에디터

한겨레주주통신원회 고대사연구TFT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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