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 : 중도일보, 빨래하는 순이

 

<순이와 봉달이>

징검다리 껑충껑충 건너가다

빨래하는 어여쁜 순이를 보았네

몰래 다가가 순이에게 물장구치니

화들짝 놀란 순이 큰 눈으로 두리번두리번

봉달이를 본 순이 빨래방망이 들고 뛰어 오네

봉달이 살려라! 급히 도망가다 신발 한 짝 벗겨지니

그 신발 주우려 뒤돌아보다 그만 순이에게 잡혔네

볼기짝 두어 대 맞고 겨우 돌려받았지

정겨운 그 빨래터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곱던 순이 모습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구나!

그녀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 무얼 할까?

개구장이 봉달이도 보고 싶구나!

 

▲ 사진출처 : 나무위키, 초등 등교길, 징검자리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라는 미명(?)아래 고향산천은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잘 살기 위한 명분이라지만 개발이 무차별적으로 착공되었다. 그 길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심지어 사람 목숨까지도 방해된다면 가볍게 여기고 가차 없었다.

토담집도 허물어지고 구불구불 골목길도 넓혔다. 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막무가내였다. 따르지 않으면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흉흉한 소문도 난무했다. 풀과 나무들이 무성한 굽이굽이 흐르던 생태실개천이 쭉쭉 뻗은 시멘트와 돌로 축조된 신개념(?)의 개천이 탄생했고, 앞산도 뒷산도 파이고 허물어져 평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게 개발이고 발전인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좋기는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이고 발전일까? 과연 우리는 잘 살아지는 것일까?’

산천이 그렇게 망가지니 사람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이권(돈)에 눈이 멀어 다정했던 이웃 간에 다툼이 생겼고, 자신의 이익을 키우기 위해 경쟁되는 이웃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들도 했다. 인심이 흉흉해지고 삭막해졌다.

그러다 보니 고향산천을 등지는 사람이 하나둘 생겼고, 남은 사람들도 변했다. 먼 친척보다 가깝다는 이웃사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앙숙이 되어 인사도 하지 않게 되었다. 토착민들이 떠난 자리엔 점점 외지인들이 이주해 왔다.

부지불식간에 마을의 정서는 메말라 갔고 사람들도 그에 익숙해졌으며, 이런 풍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웃의 대소사가 생기면 자기 일을 밀쳐놓고, 밤을 함께 지새주던 이웃은 먼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고향을 일 년에 두어 번 찾지만, 세월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젠, 고향이 고향 같지 않은 고향이 되어버렸다. 가 보았자 버선발로 달려나오시던 부모님은 수십 년 전에 작고 하셨으니 모습을 뵐 수 없고,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시던 친인척들도 보이지 않거나 마주쳐도 먼둥먼둥 하였다. 무엇보다 서로의 벌거벗은 몸뚱이 어느 부위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다 아는 깨복쟁이 친구들이 없다.

그러하니 어찌 예전 같은 고향 맛이 나겠는가?

간만에 찾은 고향이 낯설고 서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마을을 드나들 때 어김없이 거쳤던 당산어귀도, 산골짜기에 소떼 몰아넣고 뛰놀던 뒷동산도, 여름이면 훌훌 벗고 목욕하던 실개천도, 겨울이면 썰매 타던 앞 시냇가도, 평균대를 걷듯 뒤뚱거리며 거닐던 논두렁밭두렁 길도, 아침이면 둥근 해가 뜨고 밤이면 달마중 나갔던 앞동산도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고향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고, 정다운 이웃들의 정취가 꿈틀대는 곳일 진데... 그러함이 없으니 고향 같지 않은 고향이 되버린 것이다. 고향 맛이 없는 쓸쓸한 그 고향, 친근한 듯 하면서도 서먹한 곳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린 때만큼 행복한 시절이 있었던가? 그때가 그리워 찾은 고향인데... 고향에 가면 어린 시절이 되살아났고 포근한 어머니 품같았는데... 그를 찾을 길이 없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 어느 여름날 초등등교길 봉두재에 선 깨복쟁이 친구들(좌로부터 영남이, 윤석이, 태평이)

얼마 전, 어렵사리 깨복쟁이 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비록 심심 두메 산골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인근도시에서 공직생활하다 퇴직한 친구들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친구들에게서 고향을 보았고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진정 그들이 고맙고 반가웠다.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깨복쟁이 친구들과 초등학교 등하교 길을 걸었다. 개울을 건너고 고개를 넘던, 험하고 먼 약 4.5Km(왕복 9Km)의 길이었다. 그때는 왜 그리 멀고 멀었던지... 하지만 이제 가보니 고개는 생각보다 낮았고 개울은 너무 좁아 한 뜀으로 건널 수 있는 개천이었다. 지금은 거의 밀림이 되어버린 고갯마루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한다.

그 시절 그 느낌을 어찌 다 쓰겠는가? 여기에서 그친다. 동감도 이감도 하실 것이다.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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