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51] 대장군 한신의 과하지욕(胯下之辱)

一飯千金의 한신(BC 230?~BC 196) 김동호 객원편집위원l승인2018.01.08l수정2018.01.1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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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치기일망정 싸우다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의미로 제가 자주 언급한 인물이 한신입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죽음보다 더한 치욕도 견뎠고, 찬밥 한 덩이도 기꺼이 얻어먹었습니다.

한신은 살아서 평생을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이란 욕(과하지욕,胯下之辱)을 먹었고, 역사에서도 개국공신이라는 미명보다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으로,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토사구팽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의 한나라 건국도, 장량(장자방)의 책략도 무용지물이었으며 결코 항우를 상대할 수 없었다고 평합니다.

한신은 초나라 땅 회음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와 사별합니다. 15-6세 때 어머니가 죽었는데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의 빈한한 형편이었고, 힘쓰는 일도 할 줄 모르며 또래들과 어울릴 줄도 모르는 한심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희멀건 얼굴에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한신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남의 집 빨래를 해주고 밥을 먹는 표모가 수십일 동안 밥을 나눠주자 그걸 먹으면서 크게 감동한 한신이 나중에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가 오히려 욕을 먹지요. 실제로 나중에 왕이 되어 천금으로 갚지요. ‘밥 한 끼에 천금으로 갚는다.’는 일반천금(一飯千金)의 고사 유래입니다.

그렇게 빈둥거리면서도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칼을 몸에 차고 다녔습니다. 동네에서 거들먹거리던 양아치 같은 건달이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지나가는 한신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곤 “야, 허우대만 큰 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라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죽기가 두려우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며 길을 막고 버티고 섰습니다. 한신이 주변 패거리들을 보더니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서 목숨을 보전합니다.

▲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가 유명하여 여러 사람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歌川國芳(1798~1861) 그림  사진:wikipedea

한신이 후에 대장군이 되는 과정도 사서마다 조금은 애매합니다. 처음에 항량의 반군에 가담을 했다가 항량이 죽고 항우의 휘하에 있었지만 미래가 없다고 판단, 홍문연 이후 한왕 유방이 파촉(서촉)으로 떠나자 따라갔다는 설과, 장량(자방)이 친분이 있는 항백의 집에서 서초패왕 항우에게 한신이 올리는 상소문을 보고 한신을 만나 한나라 대장군으로 추천하고 파촉으로 보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그동안 유방을 따라다니며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 번쾌, 주발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있는데 적대관계의 항우 휘하를 떠나 자기들을 따라나선 이름 없는 한신이 대장군에 임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한나라 유방이 파촉으로 떠난 지 3년 만에 대장군이 된 한신이 군을 재정비하여 관중으로 돌아왔음을 보면, 파촉으로 떠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유방의 군에 합류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사마천은 한신을 찌질 하고 궁상스럽게 묘사를 했는데, 이는 아마도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남근을 거세하는 궁형의 굴욕을 감수한 트라우마, 혹은 비록 7대 황제이지만 실제로는 유방의 4대손이며 유방 사후 50여년이 흐른 한 무제 시절에 유방에게서 축출당하고, 토사구팽이 된 한신을 유씨 천하에서 좋게 묘사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한신이 상소를 올리고 대장군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 왕손은 아니어도 언급된 백정이거나 천민은 아닐 것입니다. 웬만한 형편이 아니고는 당시 글을 배우기가 용이하지 않은 시대였는데, 한신은 병서를 읽거나 사사받을 정도의 학식을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제가 읽은 사서 중에 스토리가 좀 더 탄탄한 내용으로 글을 씁니다.

책사 장량은 유방을 도와 관중을 먼저 차지하지만 자기들 진영에 전군을 통솔할 인재가 없음을 아쉬워합니다. 홍문연 이후 한왕이 되어 부임지 파촉으로 들어가는 유방에게 진언하여 잔도를 모두 불사르게 합니다. 항우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면서, 따르는 병사들이 쉽게 이반을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렸지요. 그리고 자신은 대장군 제목을 찾아 징표를 주어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발길을 돌려 중원으로 나옵니다. 나오면서 약초를 캐는 사람이나 사냥꾼에게 그들만이 아는 암도를 물어 새로운 길을 찾아내지요.

다음으로 전국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가 보관된 서고로 가서 관리인에게 뇌물을 주고 은밀히 들어가 상소문을 열람합니다. 그곳에서 한신이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탄을 합니다. 만약 한신의 진언대로 군을 관리하고 경계를 한다면 한나라 유방은 평생을 파촉에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길로 한신을 찾아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징표를 주며 파촉으로 가서 승상 소하를 찾아 이 징표를 보여주면 장군으로 임명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파촉으로 들어가는 암도를 알려주지요.

한신은 곧장 파촉으로 떠나 소하를 만납니다. 승상 소하는 책사 장량(장자방), 대장군 한신과 더불어 한나라 개국 3대 공신입니다. 나라 안 살림을 워낙 잘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업적을 남기지요. 소하가 몇 번 한신과 대화를 해보니 그 그릇이 보통이 아니어서 유방에게 천거를 합니다. 하지만 유방이 차일피일 미루며 한신을 중용하지 않았고, 결국 실망을 한 한신이 파촉을 떠나자 소하가 부리나케 쫓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그제야 유방이 한신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생김새나 나이로 보아 그리 호감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군이 아닌 궁녀들도 조련을 할 수 있느냐고 엉뚱한 이야길 꺼냅니다.(대만 이야기 8. 대만의 슬픈 역사에서 시범케이스로 언급)

한신이 궁녀들을 모아놓고 유방의 애첩을 지휘관으로 하는 조직편제를 하고 지휘를 하지만 여기 저기 키득거리며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군령을 내려 또다시 지휘를 따르지 않으면 참수를 하겠다고 하고, 다시 지휘를 합니다. 역시 마찬가지. 그러자 한신은 유방이 말릴 틈도 없이 애첩을 참수하는 시범을 보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떤 잘 훈련된 군대보다 질서정연하게 지휘를 따랐지요.(일설에는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의 5대손 손빈의 고사라는 설도 있음)

대장군에 임명이 된 한신의 지휘아래 정예군으로 다시 태어난 한나라 군대는 BC206년 8월 파촉을 출발하여 중원으로 나옵니다. 한신은 장량에 의해 불타버린 잔도를 고치는 척 항우를 기만하고, 암도로 군을 이동시켜 관중을 정복합니다.(명수잔도 암도진창, 明修棧道 暗渡陳倉, ‘겉으로는 잔도를 고치는 척 속이고, 몰래 진창고도로 진격하다’는 고사. 성동격서)

▲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 성동격서의 전술로 잔도를 수리하는 척 이목을 끌고

암도로 몰래 나와 관중을 공격 사진 출처: TimeTW.com

관중을 정복한 유방의 한군은 제나라를 치기 위해 항우가 자리를 비운 초나라 수도인 팽성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3만 명의 정예를 대리고 나타난 항우에게 팽성대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형양으로 도망가 패잔병을 수습하고 대치를 합니다. 이 참패를 계기로 유방의 편에 있던 제후들이 또 흔들립니다. 그중의 위나라 위표는 핑계를 대고 항우의 진영으로 넘어가지요. 유방은 한신을 파견하여 위나라를 치게 합니다.

한신은 일부는 도강을 하는 척 하며 적군을 유인하고 본인은 주력을 끌고 상류를 돌아 협공하는 전술로 위나라를 간단하게 평정합니다. 한신은 이어서 ‘3만의 군을 더 보내주면 북으로 연나라를 치고, 동으로 제나라를 친 후, 남쪽으로 초나라를 쳐서 초의 보급로를 끊고 형양으로 가겠다.’는 서신을 유방에게 보내자 장량도 그 의견에 동조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한신의 북벌이 시작됩니다.

편집: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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