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평 주주통신원님이 찍은 광주의 아침 설경입니다.

대만은 눈 구경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해발 3,400m의 허환산(合歡山)인데도 1년 중 약 열흘 정도만 눈이 옵니다. 그 때마다 눈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지요. 허환산은 해발 3,000m까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으므로 대만사람들에게 이국적인 설경을 체험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드물게도 타이베이 양밍산(陽明山)에 눈이 내렸다고 친구가 설경을 보내주었습니다. 한국 광주에서도 주주통신원 김태평 선생님이 밤사이 내린 눈 사진을 보내주셨고요.

▲ 대만도 강력한 한파가 밀려왔습니다. 예년과 다르게 타이베이에 있는 양밍산(陽明山)에 눈이 내렸다고 친구가 보내준 사진입니다.

이들을 접하고 보니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입영열차에서 바라보던 첫눈이 새삼 떠오릅니다. 함께 입대를 했던 친구도 생각이 나고요. 그립습니다.

1980년 봄의 아픈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제가 어디 주동해서 나서는 변변한 인물은 못되었습니다. 단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큰 신장으로 교문을 나설 때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맨 앞줄에 서서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대치하곤 했었지요.

그러한 연유로 그해 9월 학기에 휴학 후 입영신청을 했습니다. 같은 고교와 동일 대학을 다니는 친구도 함께 휴학을 했지요. 입영 날짜도 같았습니다. 서울 마포구와 용산구 입영 자들이 같은 날 마포의 모 고등학교 운동장에 집합했고, 출신 구가 다른 친구와 저는 각기 다른 칸에 몸을 실었습니다.

고교와 대학 여자 친구들 또는 어머니의 눈물과 이별을 하는 장면이 많이 보였지만, 친구와 저는 서로의 낫선 빡빡 민머리만을 안쓰럽게 바라봐야 했습니다.

입대하는 저를 위해 울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고1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까지 계시지 않았으니... 중고교시절 여학생은 구경도 못했고, 대학가면 뭐 좀 달라질까 생각했지만 막상 학과에는 20여명의 동기 중에 달랑 여학생 둘, 그녀들은 하필 제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만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두 여자 동기는 애당초 먼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였지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서 함께 밥 먹었던 기억만이 새록새록 납니다.

손이라도 잡아줄 여인은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항상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 있지도 않은 서러운 임을 날이면 날마다 보내주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전 성인의 말을 본의 아니게 잘 실천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분들께서 여자를 돌처럼 보라고 하셨는데, 본의 아니게 저는 잘 실천하고 있었던 게지요.

아무튼 입영열차안의 공기는 사안의 경중은 달랐을지 몰라도 이별의 먹먹함으로, 내일의 불안으로 무겁고 우울했습니다. 용산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입영열차는 참으로 느리게 움직였습니다. 군은 속도가 생명일 터인데 완행 중의 완행이었습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디서에서 시작한 눈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눈발이 대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12월 짧은 해가 다 가기 전에 논산에 도착했고, 우리는 훈련대기병(장정)으로 입소했습니다. 연병장에 도착하자 뻣뻣한 기간병들이 줄을 세우더니 내무반을 무작위로 배정했습니다. 처음부터 가장 강조했던 것이 민첩한 동작이었습니다.

연병장에서 유일한 친구와 만나 같은 내무반 배치를 시도했지만 결국 멀리 떨어진 내무반으로 배정받았지요. 연병장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고 우리는 인솔 병을 따라 배정내무반으로 갔습니다. 생활수칙과 주의사항 설명이 꽤 길게 이어졌고 위반시 벌칙등 겁을 많이 주었지요. 역시 빠른 동작을 또 강조했습니다. 제 자리는 출입구에서 제일 먼 안쪽이었습니다.

목욕을 위해 ‘밖에 모여’라는 구령과 동시에 박차고 뛰어나가려고 하는데 제 신발이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 신던 낡은 구두를 그대로 신고 갔었지요. 일설에 의하면 기간 병들이 괜찮은 신발을 빼돌린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안쪽에서 멋모르고 내 신을 찾아 두리번두리번 했지요. 그러다 보니 동작은 굼떳고 하는 수 없이 눈 덮힌 연병장을 향해 맨발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깜깜한 밤이라 누가 누구의 신발을 신었는지, 맨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간혹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것을 듣고 저와 같은 어리바리한 인간들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저는 동작이 느립니다. 마음으로 위로하고 있지만 제가 보아도 행동은 더디고 운동엔 소질이 없습니다. 거기다 먹는 양에 비해 마른 편입니다. 저의 소원중 하나가 살집 있는 건장한 남성입니다. 지금은 제법 체격을 갖췄지만 군입영 전에는 178Cm에 55~6Kg이었으니 말라깽이였지요. 거기다 유난히 큰 머리를 지탱해야 할 몸은 참으로 안스러웠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제일 싫어하는 수업은 음악과 체육이었습니다. 저는 초등운동회에서 달리기할 때 마다 둘이 뛰면 2등, 넷이 뛰면 4등을 했습니다. 그것도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지만 그 때는 정말 싫었습니다.

키는 제일 큰 아이가 뒤에서 1등으로 뛰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부 저를 보고 한 이야기로 들렸기에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마음은 칼 루이스인데 몸은 따라 주지 않았던게지요. 조그마한 친구는 저 앞에 뛰어가고, 남은 거리는 줄지 않으니 정신과 마음이 몽롱했습니다. 그래도 그리운 그 시절입니다.

오늘 멀리 광주에서 눈이 내렸다는 소식과 사진, 그리고 접하기 힘든 대만설경을 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맨발로 연병장을 뛰어갔던 입영 첫날의 우수에 젖습니다. 지나고 나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인가 봅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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