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중국 천진에 살고 있는 조카네 집에 다녀왔다. 조카네 집에 찾아 온 손님과의 대화는 중간에서 조카내외가 통역해줘서 불편은 없었다. 한자세대인 우리는 한자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 줄 알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배운 한자를 알지 못한다는데 놀랐다. 중국인들은 불편한 한자를 의사소통의 문자로 바꿔 점차 편리하게 바꿔가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한자로 쓰여 있는 간판의 글자가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문화란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필요해 만든 결과다. 정신문화든 물질문화든 문화란 사람들이 삶을 편리하고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학습성, 축적성, 공유성, 전체성(총체성), 변동성’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필요에 의해 등장한 문화가 주객이 전도돼 사람을 오히려 불편하게 하거나 허세나 과시로 인해 삶을 옥죄는 반문화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때 상명대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유행이 됐던 적이 있다. 봉건제 사회의 공자가 민주주의 시대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는 모순을 비판한 글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유교란 봉건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등장한 인위적인 질서다. 당시의 가정과 사회,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이데올로기가 유교였던 것이다. ‘개발에 주석편자’처럼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살면서 불편은커녕 이를 금과옥조로 알고 있다면 고집도 이런 옹고집이 없다.

대가족제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가족구성원이 이산가족으로 살기 시작했다. 산업사회의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가부장중심의 문화나 제사문화 등에서  전통가치관의 기성세대들과 문화충돌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부터 종교가 된 공맹사상을 남송의 주희(주자)가 오경의 뜻을 정리해 완성한 학문이 성리학(주자학)이다. 중국의 문화권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주자학이 학문의 전부였으며 문화의 핵심으로 삶의 표준이 됐던 것이다.

주희의 성리학(주자학)은 명대뿐만 아니라 원명시대를 거처 청조에 이르기 가지 우리의 사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관혼상제를 비롯한 제사문화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은 삶의 표준이요 금과옥조였다. 어느 가문이 더 주자답게 관혼상제를 치르느냐에 따라 가문의 위상이 달라질 만큼 성리학은 절대적인 가치가 됐으며 사람들은 유교의 틀 속에 갇혀 살게 되었다. 성리학이 얼마나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느냐는 것은 지금도 가문을 자랑하는 관혼상제가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말해주고 있다.

▲ <이미지 출처 : 천재백과사전>

특히 신위를 모시고 신위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동쪽,왼쪽은 서쪽’으로 차리는 제사상은 어느 가문에 얼마나 이 원칙을 잘 지키느냐에 따라 위상이 달라진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차림은 서민이 아닌 양반가문의 제사상차림이다. 조선시대는 사(士)·농(農)·공(工)·상(商)의 계급사회다. 조선시대 인구 중 양반은 불과 1.9%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성을 가진 사람은 15%에 불과했다. 1800년대 초 공노비해방이 이루어지고 갑오개혁전후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그 많은 천민과 노비들이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늘어난 양반들이 너도나도 양반의 문화를 배워 성리학의 관혼상제를 생활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계급사회에는 양반계급 이외의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의 흉내를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이었다. 그러나 계급사회가 무너지면서 양반이 되고 싶었던 평민들의 동일시현상이 나타났다. 좀 더 양반답게 보이고 싶어서일까? 세상은 변화했지만 유독 성리학의 관혼상제문화만큼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요지부동의 교과서역할을 해 오고 있는 것이 다.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파괴하여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반문화가 아니라면 오랜 관습의 관혼상제문화에 태클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관혼상제문화 특히 명절문화는 심각한 후유증을 안고 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수천만 명의 이동으로 겪는 불편이나 사고는 이제 연례행사가 됐지만 명절이 끝난 후 이혼율 증가와 고부갈등, 형제들 간의 제사나 부모를 모시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갈등은 후유증을 안은 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알파고 시대, 4차산업혁명시대에도 주자가문의 흉내를 내며 사는 게 양반가문의 체통을 지키는 일일까?'

편집 : 심창식 부에디터

김용택 시민통신원  kyongt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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