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6현사 터에서 출발하여서 우산리로 들어서서 우산리 택촌 마을을 지나 들어갔다. 암감질 밖감질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보아서 좀 뒤쪽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마을을 지나자 조금 훤한 벌판이 나왔는데 이 벌판에 순천과 목포를 이어주는 호남남부철도선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보성 서부역이 만들어질 것이라는데 벌써 기초 공사를 위한 터파기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회원일동 인증샷

이 기차역 공사장을 지나서 정면으로 보이는 약간 언덕진 터 위에 우뚝 선 대계서원이 보였다. 문강공 은봉(隱峰) 우산(牛山) 안방준(1573~1654) 선생의 도학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다. 은봉은 보성 우산리에서 태어나 박광전, 박광성,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에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 은봉의 업적은 우선 후학의 양성이었다. 우산전사와 운봉정사에서 교육과 저술에만 몰두했다. 공의 저술로는 임진왜란사를 정리한 진주서사, 삼원기사, 호남의사를 비롯하여 모두 7권을 남기셨고, 선비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기묘유적, 항의신편을 그리고 당쟁과 관련하여 혼성편록, 기축기사 등의 저술을 남기셨다. 은봉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후 <1657년>에 보성유림의 발의로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1704년<숙종30년>에 [대계서원(大溪書院]이라 사액되었으나 수재를 당하여 1787년에 보성읍 장원봉 기슭에 옮겨지었으며, 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68년 헐리고 말았다.

▲ 대계서원 입구

은봉을 추앙하는 유림들과 후손들의 협력으로 2005년부터 다시 세울 계획을 추진하여 은봉 종가가 바라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사당, 강당, 동재, 서재 유물관까지 갖춘 서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사당은 송준길의 글씨를 집자하여 조문사(祚文祠)로 하고, 대계서원의 현판은 숙종대왕의 어필을 집자하여 썼다. 서원에는 전남유형문화재 303호인 서책 진신장의안, 유안, 심원록, 전답양안 등이 소장되어 있다. <대계서원 안내판 기록> 이렇게 세워진 대계서원은 우산리가 안씨들의 집성촌인 점과 우산리와 우산선생의 호와 어우러져 더욱 돋보이는 듯하였다. 내가 보성남교에 재직중에 가르친 제자들 중에서 우산리 출신의 의학박사 안호범은 성형외과 의사로 크게 성공하여 서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을 정도이고 많은 제자들이 모범적으로 자라 주었다. 아마도 이런 전통과 훌륭한 조상의 후광을 받은 덕분이었을 것이다.


◆ 大溪書院

○ 牛山(隱峯) 安邦俊(1573~1654. 11. 13) 선생 配享

○ 1608년(효종 8) 건립, 1704년(숙종 30) 현판을 賜額하고

嘉善大夫 吏曹參判을 贈職한 후에 資憲大夫 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을

증직하고 文康의 諡號를 내림

○ 牛山 선생은 竹川 朴光前과 牛溪 成渾 선생 문하에서 수업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장인 三島 任啓英 장군

막하에서 體察使인 鄭澈과의 연락참모 역할 수행

○ 1636년(인조 14) 丙子胡亂 때 도내 의병을 인솔하고 礪山(전북)

까지 진군하였으나 강화 소식을 듣고 의병부대를 해산 후 귀가


우산 선생의 남다른 애국정신은 국란을 당하여 세 번씩이나 창의하여 의병으로 활동을 하셨다는 점일 것이다. 무관이 아닌 학자요 선비로서 오직 나라사랑의 정신으로 세 번이나 창의를 하신 선생은 특히 병자호란에 도내 의병을 인솔하여 여산까지 진격 하셨을 때에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령이었으니 그 애국충성심이 얼마나 크셨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보성의병사에 실린 안방준의병장의 병자호란 창의 이야기]

병자호란과 보성의 창의

북쪽의 근심스런 일과 남쪽의 어려움이라는 말로 우리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표현해야 하였던 조선시대였다. 북쪽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 정묘호란 그리고 남에서 일본에 시달린 임진, 정유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역사의 수난기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다음 시각에 닥쳐올 우환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오직 무방비의 천하태평을 노래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4색 당파로 갈려서 당파싸움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묘호란을 겪은 지 10년이 채 안 되어서 또다시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전쟁 기간은 불과 2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북쪽 오랑캐들의 심한 약탈과 방화 등으로 7년 전쟁의 임진왜란과 그 피해가 다르지 않았으며, 죽지 못해 목숨만 부지하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12월 1일 청나라의 태종은 마부대<馬夫大>와 용골대<龍骨大>를 선봉장으로 세우고 30만 대군을 몰아 조선 정벌의 길에 올랐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의 백마산성을 살짝 비켜 곧장 남진을 하여 14일에는 송도에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인조는 고립 되어서 갈 곳이 없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왕세자와 빈궁들은 강화도로 피신을 시켰다. 당시에 우리 고장의 큰 스승 우산 안방준 선생은 인조 조정의 랍서<蠟書:비밀 누설과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밀랍으로 싸서 봉합을 한 문서>를 받으시고 나서, 보성읍 동지 수백여 명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기로 맹세를 하고, 도내에 격문<檄文: 모두 다 일어나자는 의병을 모집하는 문서>을 보내어 의병을 모으고 양식을 거두어들이니 각 읍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여산에서 모아 청주로 진군하던 중 강화도가 적에게 떨어지고, 인조 임금이 항복을 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그의 군용 중 본군 출신의 충성과 용기가 넘치던 의사들의 이름을 다음과 기록하여 후세에 본을 삼았으면 한다.


군용

창의 대장 : 안방준

참모관 : 선시한 종사관 : 김유신 양향관 : 이무신 방량관 : 제경창

군관 : 김종원, 김정망, 이강, 정영철, 김 점, 김 진, 선영길

부장군관 : 윤흥립, 박유효, 한종임, 장준양, 임시윤

서기 : 안후지, 안신지, 안심지, 손 각

수배 : 안일지, 박무립, 박영발, 천충립

군재수 : 노비 응택, 교노- 하상, 남금

참획 : 박춘장

군모 -조정형, 조정현조홍국 조창국, 조흥국, 조순필, 조순립, 박희망, 박동건, 박동수, 박시형, 박유제, 박유충, 박유효, 박진형, 박인상, 김 선, 김치서, 이장원, 박안인, 박진호, 이시원,정 담, 정철종, 정영신, 전희계, 선춘란,

김종혁, 김종한, 김극성, 김낙희, 문희순, 문진발, 선태안, 염득순, 채입협, 채명헌, 채명익, 최 현, 최 강, 황유중, 황석준, 황득영, 황시민, 이성신,

이철신, 이옥신, 이민신, 이원신, 김취인, 김철인, 임대유, 김종기, 손후윤, 최계헌, 오영길, 정평명, 손수헌, 송홍선, 이경신, 김안신, 손석윤, 안철지, 문희경, 문시경, 김득선, 김의정, 김취저, 김정생, 김정망, 김여연, 오중윤, 소 호, 윤 구, 장운재, 심항수, 김정일, 송 송, 한종주, 한득홍, 안00,

황수남, 선우해, 선홍주, 한경복, 박진영, 윤흥립, 선암철, 선만길, 최사룡, 임망지, 김기원, 임진걸, 선기문, 김시중, 김여기, 장준량, 임굉유, 김 업, 김 시, 깅 응, 김 순, 오쟁흠, 오견룡, 김의경, 김경호, 조 시, 심 개,

곽순의, 윤동야, 위사진, 임천비, 장 진, 백안현, 김산해, 박홍인, 선정민,

박춘수, 박순인, (임 후, 박예겸, 박원겸, 박인겸, 박의겸, 전홍례, 문재도, 이종신, 선약해 : 이 9명은 안방준 군용에 들지는 아니하였음)

<참고 : 丙子倡義錄, 山陽三綱傳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전자책 본문보기***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우리 답사단 일행은 이곳에서 이제 정말 보성정신의 진수를 체험하는 듯하여 엄숙한 마음으로 묵도를 드리고 시간에 쫓겨 차분하게 유물관까지 돌아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떠나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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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paper.net/ksuntae/11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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