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모 의병장의 묘소는 의병이 궐기하던 역과대 들판을 내려다보는 길가에 쓸쓸히 있었다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답사단 일행은 보성읍 우산리를 떠나 읍내를 지나서 용문리에 있는 임창모 의병장의 묘소를 찾아서 나섰다. 들판을 지나 들어선 곳은 사실은 들판에 불룩하게 돋아나온 산줄기의 가장 끄트머리 부근에, 그것도 길가에서 약 10여 m 정도밖에 안 되는 길가에 방치되다시피 되어 있는 묘소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은 돈이 많으니까, 묘소들을 보면 화화묘소, 들판 같은 너른 묘소 주변, 귀한 나무들로 장식을 해두고 있는데....’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 묘소 앞에 모여서 묵념드리고

모두 모여서서 고개 숙이는 것으로 이곳을 방문한 우리들이 할 일이 이것뿐이라는 것이 안타깝고 부끄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임창모 의병장의 활동은 이미 써둔 기록을 옮겨 보면

[을사5조약이 억지로 맺어지는 것을 보고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과 왜적을 모조리 없애지 못함을 억울하고 분해하다가 광무 10년<1906년> 병오년에 의병장 양회일이 능주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선봉장으로 활동하다가, 복천에서 적의 대병에게 포위되어 회일과 함께 붙잡혀서 지도에 갇히게 되었다가 1년 정도 만에 석방이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장 다시 봉기하는데 곧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서 무기들을 준비하고 장사들을 모아서 융희 2년<1908년>무신년 봄에 500여 명의 의병들과 더불어 일어섰다. 정태화로 선봉장을 삼고, 임봉수는 포병장을, 강영섭, 임하중, 임양표를 참모로 삼아 의병의 진영을 갖추었다. 역과대 들판에서 [호(虎)]자 기를 대장기로 앞세우고 출정을 하였던 곳이란다.

단을 쌓고 소를 잡아 피를 뿌려 하늘과 땅의 신들께 고사를 드리고 나자, 적군이 고흥에 상륙하여서 보성으로 행진한다는 정보를 듣고, 즉시 출동하여서 적군이 지나갈 곳의 가장 막기 좋은 자리에 매복을 하고 기다리다가 적을 공격하여 대부대를 죽이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가령치에서 완전히 파멸 시켰다.]

▲ 묘소를 찾았다는 인증샷찍어 주기만 하여서 이날 행사중 유일한 나의 사진이다

이런 의병활동을 했던 임창 모의병장은 일제에 항거하였던 분이었으므로, 그 가족과 일가친척들까지 일제치하에서는 불량선인으로 지목을 받아서 사실상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험난한 시대를 보내어야 하였던 것이다.

이곳 묘소가 있는 앞 들판을 역과대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의병창의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죽천 박광전 의병장께서 67세의 노령으로 의병을 모아 출정을 하게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장 다시 봉기하는데 곧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서 무기들을 준비하고 장사들을 모아서 융희 2년<1908년>무신년 봄에 500여 명의 의병들과 더불어 일어섰다. 정태화로 선봉장을 삼고, 임봉수는 포병장을, 강영섭, 임하중, 임양표를 참모로 삼아 의병의 진영을 갖추었다. 역과대 들판에서 [호(虎)]자 기를 대장기로 앞세우고 출정을 하였던 곳이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바라본 들판은 이제 추수가 끝나고 빈 벌판이어서 저 들판 한 가운데에서 [虎]자 기를 앞세우고, 함성을 지르면서 일본침략자들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달려 나가는 환상을 보는 듯하였다.

이 역과대 들판에서 [호(虎)]자 기를 대장기로 앞세우고 말이다.

참고: 역과대(일명 여꽈대)

○ 위치 : 보성읍 龍門 2리

○ 조선조 때 龍門面 일대 寥坪村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寥坪으로 하고 역과대라 불렀으나, 현재는 妖坪으로 개칭

[보성의병사에 실린 임창모 의병장의 무신<1908> 창의 이야기

무신 창의의 임창모<林昌模> 의병장

공은 조양임씨이며, 자는 낙균<洛均>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라 하였다.

남을 이해하고 굽힐 줄 모르는 굳은 마음이 뛰어나고 남달랐다.

을사5조약이 억지로 맺어지는 것을 보고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과 왜적을 모조리 없애지 못함을 억울하고 분해 하다가 광무 10년<1906년> 병오년에 의병장 양회일이 능주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선봉장으로 활동 하다가, 복천에서 적의 대병에게 포위 되어 회일과 함께 붙잡혀서 지도에 갇히게 되었다가 1년 정도 만에 석방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 곧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서 무기들을 준비하고 장사들을 모아서 융희 2년<1908년>무신년 봄에 500여 명의 의병들과 더불어 일어섰다. 정태화로 선봉장을 삼고, 임봉수는 포병장을, 강영섭, 임하중, 임양표를 참모로 삼아 의병의 진영을 갖추었다.

단을 쌓고 소를 잡아 피를 뿌려 하늘과 땅의 신들께 고사를 드리고 나자, 적군이 고흥에 상륙하여서 보성으로 행진한다는 정보를 듣고, 즉시 출동하여서 적군이 지나갈 곳의 가장 막기 좋은 자리에 매복을 하고 기다리다가 적을 공격하여 대부대를 죽이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가령치에서 완전히 파멸 시켰다.

이때 안담산 의병장이 큰 세력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서 두 세력이 거의 같은 세력으로 쌍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안의병장이 의병을 해산하자, 흩어지던 의병들이 모두 여기로 모여들었다. 융희 3년 <1909년> 8월 29일 밤에 108명의 정예부대와 함께 복내 흑석동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 아들 중군장 학순이 교전을 계속하다가 아들마저 적탄에 쓰러지니 학순의 나이 22살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의 유해를 거두어 장사지내었다. 이에 적장 石富가 비록 적장이지만 부자의 충혼에 조문을 하고, 후한 조위금을 내어서 위문하였으나, 임창모 의병장의 처 임<任>씨와 자부 최씨는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광복 후에 임태규, 임의돈, 임경철 등 다수의 향리 학자들이 용문리 주름방죽 옆의 산기슭에 충의비를 세웠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을 그의 4대손 임하회에게 수여 하고 그의 충의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였다.

<참고 : 韓國獨立運動史, 全羅南道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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