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 2017년11월29일 10:00~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용산서원은 인터넷에는 아직도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덕림리에 있는 서원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지만, 현재는 노동면 명봉리로 옮겨져 현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광전(朴光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07년(숙종 33)에 ‘용산(龍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내왔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가, 1984년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가 들어선 용산서원은 이제 새로 세운 건물의 새로운 냄새가 가시지 않았으며, 아직도 정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현재 건물의 이웃에는 아직도 토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흙을 모아두고 있었는데, 이곳에 [보성군의병역사관]을 만들고자 희망하고 있으며, 군 예산이 책정되어 2,3년 안에 의병역사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믿으니 우리들의 활동이 성과를 거두어서 많이 참고가 되어 좋은 자료를 제시하고 발굴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 [용산서원은 보성출신의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을 제향했던 곳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84년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1607년 죽천의 학덕과 충의를 평소 흠모하였던 이 지방유림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특히 건원시에는 죽천의 문인으로 문명이 높았던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1607년(선조 40) 그는 <건원통문建院通文>을 작성하여 열읍과 유림에게 전하는 한편 실제로 정길(鄭佶)을 비롯한 도내사림들의 협조를 얻어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610년(광해군 2)에는 광해군이 왕세자 시절 그의 사부였던 죽천에게 증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을 증직하였고, 가묘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기도 하였다. 창건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705년(숙종 31)에는 호남유생 임치당 등이 용산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렸다. 당시 청액의 이유로는 우선 이미 건립된 지 100여 년이 경과하여 제향하여 왔다는 점과 다른 設處가 없다는 점, 그리고 학덕과 행의가 사림의 추앙을 받을 만 하다는 사실이 지적되었고, 당시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조태채가 주선하여 사액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선액이 된 것은 2년 뒤인 1707년(숙종 33)이었으며 이는 당시 용산서원의 원장이었던 권상하, 이만성, 신임, 김흥경, 이재, 조연빈 등의 합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후 한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죽천의 7대손인 박벽덕과 윤종의의 <용산서원중수상량문>이 그 사정을 알려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때는 죽천의 묘지명찬(1738년), 문집완성(윤봉조書, 1739년), 묘표찬(윤봉구撰, 1748년) 등 일련의 사업들이 이뤄지던 시기가 지나고 1809년 문집이 중헌되던 어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후 1871년 훼철될 때까지의 특기할 연혁은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1809년(순조 9)에 이루어진 죽천문집의 목판각주와 1834년(순조 34)의 청액소와 이에 의한 증직 및 문강이란 익호 하액(1841) 등이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산서원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박광전 의병장은 이미 환갑이 훨씬 넘은 66세가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를 위해 격문을 보내고 창의병을 모아서 전라좌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에는 이미 칠십을 넘은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화순 적벽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였으나 노환으로 군영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모든 사람들의 애국충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가장 표본이 될 만한 분이시다.

**보성군청 홈페이지에 소개 된 박광전 선생

박광전은 중종 21년(1526) 조성면 용전리에서 태어났으며, 이퇴계의 문인으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대 유학자로서 광해군의 사부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우고 문인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전라 좌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전란극복을 위해 백성들을 위무하고 유민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우국충정을 몸소 실천했다.

1597년 정유재란시에도 칠순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벽전투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노병으로 인해 군영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사후에도 평소 그의 학덕과 충의를 흠모했던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숙종 33년(1707)에 용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용산서원은 명봉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죽천선생은 자신이 스스로 의병창의를 주창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모았지만, 자신이 대장을 맡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을 하신 것일까 보성의병장의 많은 대표가 되는 사람들을 모아 의병장으로 키웠으니 본이 될 만한 분이시다.

◆ 龍山書院

○ 竹川 朴光前 선생(1526~1597)을 배향

○ 1607년(선조 40) 건립하고 1707년(숙종 33) 賜額하였으나 1871년

(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 당초 미력면 덕림리 牛谷마을에 있었으나 2016. 10월 蘆洞面 鳴鳳里 현재 위치로 이전 復設

○ 退溪 李滉선생의 문인 1581년(선조14)46세 때 王子(광해군) 師傅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계영을 대장에, 文緯世를 糧餉官으로, 안방준을 연락참모로 삼아 의병활동 전개

○ 1610년(광해군 2) 左承旨에 追增, 1835년(헌종 1) 吏曹判書兼成均館祭酒 증직하고 1841년(헌종 7) 文康의 諡號를 내림

위의 글에서 보듯이 죽천 선생은 보성의병의 대표라 할 만한 임계영, 문위세, 안방준 등을 의병장으로 임명하여 의병 활동을 다른 고장보다 더 활발하고 뛰어난 고장이 되도록 하였다.

70 고령의 죽천은 나라의 위험한 처지를 구하기 위해 나서신 분이다.

그러나 본인이 앞장서서 싸우기엔 너무 나이가 드신 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젊고 힘차고 용기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각각 알맞은 부서를 맡겨서 싸우게 조직을 해주신 것이다. 임계영, 문위세, 안방준, 정사제, 소상진, 박사길 등은 보성을 대표하는 의병장 들이다. 이런 분들을 의병장으로 키워내신 분이 바로 죽천 박광전 선생이신 것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유희춘(柳希春)이 감사(監司)였을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고, 다시 헌릉참봉(獻陵參奉)으로 옮겼으나 곧 그만두었다. 1581년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함열(咸悅)·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하였으나 상관의 뜻을 거슬려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任啓英)·김익복(金益福)·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 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從事)로 삼고 장자인 박근효(朴根孝)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判官)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동복(同福)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보성의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적벽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이제 적벽의 풍경만을 보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이 적벽에서 왜적을 물리치신 70대 노장군의 애국지심을 다시 한 번 새겨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보성을 의향이라 부르게 만들어 주신 죽천 선생, 그리고 수많은 의병장들을 길러서 우리 역사에서 5번이나 의병이 일어나게 만든 첫걸음을 만들었고, 그 의병역사의 디딤돌이고 노딧돌(징검다리)이 되어 주신분이 바로 죽천 선생이 아니신가?

임진왜란 때의 보성군 창의

일본이 임진년에 쳐들어오자 전쟁 준비도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몰려오는 왜군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일본군들의 침략에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백성들은 일본놈들의 총칼에 찢기고 죽어가는 것을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일본의 침략으로 당한 치욕과 백성들의 고난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전쟁 통에도 우리 보성은 왜군의 발길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장한 고장이었다.

선조께서는 왜군을 피하여 서울을 버리고 멀리 의주까지 피난하시어서 그곳의 행재소<임시 정무를 보는 행궁>에서 정철을 전라도 도체찰사로 특파하여 보내어서 호남의 충성심이 뛰어나고 용감한 의병들을 격려하시었다.

“호남은 과연 나라의 기틀이 되는 고장이오.”

“절의<충절과 의리를 지키는>의 호남이다.”라고 격려를 하시면서 제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려는 충성심이 깊은 의병활동에 감사와 격려를 보내주셨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가장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을 서야할 고위 벼슬아치를 비롯한 의정부 요인들은 임금님을 호위하는 일조차 버리고 제 자신과 가족들의 살길을 찾아 흩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고장 보성에서는 이미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의병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섰다. 의병의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하자 나라에서 월급을 받지도 않고 오직 산골 마을에 묻혀 살던 선비들이 앞장을 서고 나선 것이다. 글만 읽던 약한 몸이나마 글 읽던 흰옷들을 벗어 버리고 싸움을 하기 위해 단단히 조여 매고 싸울 수 있는 차림으로 바꿔 입고 붓을 대신하여 긴 창이나 칼을 비켜들고 나선 것이었다.

이를 보고 나라의 위험에 걱정만 하고 어찌할 줄 몰라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던 농민도 노비도, 심지어는 산속의 승려들까지 모두 조국수호를 위해 나섰다. 이들은 이제 나라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로 나선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고장 보성이 다른 고장 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굳게 뭉친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우리 고장 출신으로 나라에서 숭상 받는 큰 유학자이자, 왕자를 가르칠 만큼 높은 학식을 인정받는 큰 스승이신 죽천 박광전 선생이 앞장을 서셔서 의병을 일으키셨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보내자 제자들과 보성군의 많은 주민들은 다투어 나라를 구하는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의병을 일으키신 죽천<박광전 선생의 호>선생은 이미 67세의 고령으로 노쇠하고, 병약하신 몸으로 군사를 이끌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선생은 자신보다 젊고 활기찬 임계영 장군을 대장으로 선정하고, 큰 아드님인 박근효를 참모로, 처남 문위세를 양향관<양곡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제자인 은봉 안방준을 정철 도체찰사와의 연락참모로 하고 선상근을 본진인 보성수성장<보성을 지키는 책임 장수>으로 임명하고, 북문 밖 정자리 냇가인 역과대들에 진을 치게 하였다.

이렇게 일어선 보성의병들은 호남을 지켜서 식량자원의 보루<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지역>를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육해군의 군량을 조달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남지방까지 지원을 하여서 국토를 회복하고 왜란을 이겨내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정유재침 때에는 일본이 지난번의 일을 깨닫고 자원이 많은 호남을 점령하여 전쟁물자 지원을 막자는 전술로 나왔다. 왜적이 호남을 먼저 침략해서 남해안 지역이 점령당하고, 남원이 함락 되었다는 소식에 민심이 흉흉하여 졌다.

이를 보고 박광전, 안방준, 송홍렬, 박사길 등 우리 고장의 충신열사<나라를 사랑하여 온 몸을 바쳐 싸워온 분>들은 문덕면 천봉산 대원사에서 모여 충성심에 불타는 마음을 한데 모아 또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의병을 움직일 방법을 논의하였다.

여기에서 모인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죽천 박광전 선생이 의병장을 맡아야 한다.”고 추대를 결의 하였다.

이에 죽천 선생은 “나이 들어 몸에 병이 중하지만, 전란이 급하니 내 사양치 않고 나라를 위하여 내 몸을 바치겠노라.”라고 의병장이 되어 주셨다.

곧 안우산, 박광선 전 판관, 송홍열, 박사길, 박훈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위급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으니, 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우리 조상들의 거룩한 뜻을 잊지 않기 위하여, 함께 나섰던 우리 선조들의 성함을 일일이 여기 적어보기로 한다.

죽천 선생이 앞장을 서시자 고장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승이 나서는데 안 나설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리하여 이 작은 군에서 나선 의병의 수가 얼마인가?

여기에 명기된 인물들만도 161명이다. 임진왜란, 그 험난한 전란을 피하여 나랏님도 궁궐도 버리고 멀리 의주까지 도망을 가버리고 없는 나라의 꼴이 어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이 작은 고장에서 161명이라는 많은 의병이 일어나서 내 고장 보성을 지켜 왜군들에게는 군량의 보급을 막아내었고, 내 고장만이 아니라 이웃의 고장 아니 더 멀리 경상도까지 나아가서 왜적을 물리친 용맹을 떨쳤던 것이다.

다음의 명단을 보시면 알겠지만, 자신의 집 노비들까지 동원을 하여서 의병으로 끌고 나섰으니 얼마나 다급하고,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충절의 고장 보성의병 창의 기<명단>

의병의 중요 직책을 가진 장수<10명>

창의 총수 박광전

양향관<군량관리> 문위세

체찰부연락<도체찰사 연락관> 안방준

수성대장<본진 보성 수성> 선상근

좌의병대장 임계영

종사관 정사제

참모장 박근효

참모 박광선, 별장 소상진, 남응길, 박사길,

의병 참여자<자료 출처:호남절의록, 산양삼강록, 보성군지,--1974년판 보성군지에>

강봉세, 강희국, 깅인상, 강희원, 강희보, 강희열, 강희복, 강승훈, 강옥상, 강 절, 김홍업, 김언림, 김신민, 김예의, 김덕방, 김택보, 김성원, 김서수, 김 범, 김효생, 김위구, 김 신, 김인영, 김 준, 김대민, 김익복, 김수복, 김 곤, 김유형, 김 흔, 곽흥연, 남응개, 마하수, 마성룡, 마희룔, 문희순, 문원개,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 문희개, 문광복, 문대상, 문익화, 문익명, 문희성, 문호섭, 박응참, 박응호, 박근제, 박 훈, 박천압, 박응현, 박종전, 백한남, 백진남, 변홍원, 변홍달, 변홍주, 변홍선, 병홍양, 변홍제, 변덕일, 변홍주, 변덕황, 변덕장, 배몽리, 서영복, 서도남, 서덕숭, 선광선, 선거이, 선의경, 선경룡, 선해수, 선인수, 선경백, 선필백, 선여경, 선청원, 선정립, 선선립, 선정민, 선의문, 손응호, 손응록, 손응지, 손흥립, 손영립, 손손립, 손 민, 송상장, 송진해, 송진부, 신덕윤, 양봉수, 염세응, 염 걸, 염 제, 염 서, 염 경, 영홍립, 오경남, 오 척, 오 주, 오춘기, 오방한, 유여완, 이종인, 이경남, 이신수, 이인복, 이정지, 이향민, 이봉수, 이방준, 임백영, 임 제, 임 희, 임희진, 전몽성, 전몽진, 전방삭, 전치건, 정 회, 정대민, 정대영, 정홍수, 정홍령, 정응남, 정 길, 정정달, 정경수, 조정의, 진무성, 채은남, 채명헌, 채용해, 최대성, 최언립, 최억수, 최억남, 표 헌, 함덕립, 황원복, 황보진, <사노: 개인집의 노비> 두리, 갑성, 한이, 강룡, 기갑 등 5명

이상의 선비와 일반 백성 참여자가 146명과 개인 노비까지 모두 합하여 151

이상과 같이 직책을 가지신 장수 열 분과 일반 의병을 모두 합해서 161명의 의병 참가자들이 우리 고장을 지키고 멀리 남원성과 경상도 지역까지 돕는 등 맹활약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위의 참여자 명단을 자세히 보면 이름이 비슷한 형제가 4,5명 심지어는 6형제<변흥원~흥주>분이 보이는데 바로 형제들이 총 출동하여 모두 나선 경우까지 보이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본받을 만한 고장임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 : 湖南節義錄. 南道의얼, 山陽三綱傳,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죽천 선생은 보성 의병활동 역사의 증인이자 산모이고, 보성 의병의 기둥이시다. 이런 죽천 선생을 모시는 용산서원은 어쩜 우리 군의 의병사를 만들어낸 산실이기에 이 이웃에 [보성의병역사관]을 만들어서 의병사를 재조명하게 하고, 우리 보성의 의병사 공부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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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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